천재 예술가의 조건
파이낸셜뉴스
2026.04.23 18:31
수정 : 2026.04.23 18:44기사원문
예술은 설명의 축적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감각이 좌우
무엇을 더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끝까지 남길 것인가
그 선택 밀어붙일 수 있어야
시장과 시간 속 천재로 남아
그리고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시각예술과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천재를 필요로 하는가.
지휘자가 오페라의 원어인 프랑스어 가사를 전면적으로 체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품을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 서사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그의 지휘 아래에서 인물의 감정은 더 이상 재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필연적 귀결처럼 정교하게 조직된다.
이 경험은 천재라는 개념을 다시 묻게 만든다. 천재란 선천적 재능의 발현인가, 아니면 시간을 견디며 정제된 감각의 결과인가. 그의 현재는 분명 후자에 가깝다. 불필요한 제스처를 제거하고 본질만을 남기는 방식, 그 치열한 절제가 곧 완성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카리스마는 과시되지 않으면서도 무대를 완전히 장악한다. 역설적으로 제거가 지배력을 강화하는 구조가 형성된다. 이는 단순한 스타일을 넘어,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끝내 버릴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밀도가 빚어낸 필연적 결과다.
이 구조는 시각예술에서도 명확하게 확인된다. 예컨대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을 지속해 왔지만, 시장에서 결정적으로 각인된 것은 블러 처리된 회화라는 하나의 감각이다. 수많은 시도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명확하게 인식 가능한 단일한 언어였다.
쿠사마 야요이 역시 반복되는 점과 거울 공간이라는 강력한 시각 구조를 통해 전 세계적 인지도를 확보했다. 복합적인 작업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기억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이미지다. 이는 예술이 설명의 축적이 아니라 각인의 밀도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국내 사례도 다르지 않다. 이우환의 관계항 연작은 최소한의 개입으로 물질과 공간의 긴장을 드러낸다. 극도로 절제된 행위 속에서 오히려 더 강한 존재감이 형성된다. 이는 덜어냄이 하나의 미학적 권력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입증한다. 최근 국내 젊은 작가들 또한 서사를 확장하기보다, 단일한 시각 문법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흐름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이미지가 과잉 생산되는 시대일수록 선택의 기준은 더욱 냉혹해진다. 결국 살아남는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감각이다. 예술시장은 다양한 가능성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단 하나의 해석만을 선택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수많은 시도는 축적되기보다 압축되며,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서명으로 수렴된다.
중요한 것은 이 구조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통과는 선택을 요구한다. 모든 것을 취하려는 태도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정명훈의 무대가 보여주듯, 더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남길 것을 선택하는 일이 핵심이다. 시장은 이를 냉정하게 입증한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특정 회화 유형은 수백억원대에 거래되지만, 유사한 작업들은 거의 주목받지 못한다. 쿠사마 야요이의 작업 역시 특정 시각 구조가 하나의 브랜드로 작동하며 시장을 지배한다. 선택되지 않은 감각은 존재하더라도 시장에서는 사실상 소멸한다.
결국 결론은 명확하다. 우리는 무엇을 더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끝까지 남길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예술계의 천재란 그 선택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이다. 수많은 가능성 중 단 하나를 식별하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반복해 자신의 언어로 고정시키는 존재. 재능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는 힘, 그 결단의 밀도가 곧 천재를 만든다. 그 선택은 결국 시장과 시간 속에서 증명된다.
이상미 유럽문화예술콘텐츠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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