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학과 열풍은 신기루인가

파이낸셜뉴스       2026.04.28 18:12   수정 : 2026.04.28 18:54기사원문

최상위 대학 학과 서열을 나타내는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에 반도체학과를 더한 '의치한약수반'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요즘 반도체 계약학과 입시 경쟁률이 뜨거워지면서 생겨난 말이다. 최근까지 반도체 계약학과는 차상위권 수험생들이 의대 불합격에 대비하는 '보험'으로 간주돼왔다.

이공계 인재가 절실한 나라에서 이런 신조어가 등장하다니 반가운 징조다.

반도체학과 인기 비결은 단연 가성비의 승리에서 찾을 수 있다. 의대는 최소 6년의 본과 과정에 인턴, 레지던트까지 10년 가까운 수련기간을 버텨야 한다. 그 기간 쏟아부은 시간과 비용은 온전히 개인 몫이다. 반면 반도체 계약학과는 4년 전액 장학금에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 입사가 보장된다. 게다가 SK하이닉스나 삼성전자는 근무자에게 특급 인센티브를 제시한다. 영업이익이 지금처럼 많으면 연간 수억원의 뭉칫돈을 만질 수 있다. '고난의 10년 뒤 의사 수입'보다 '확실한 4년 뒤 억대 연봉'이 낫다는 계산이 수험생들의 머릿속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나 보다.

최상위권 학과 선택은 돈 외에 명예도 큰 변수다. 의사직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로 여겨진다. 반도체 엔지니어에 대한 인식도 과거의 단순 기술자에서 벗어나는 모습이다. 인공지능(AI) 바람을 타고 인류 문명의 인프라를 설계하는 혁신자로 재정의되고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설계자라는 인식이 직업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자리 보장이다. 면허를 갖는 의사직은 정년이 없다. 마찬가지로 AI 대세론에 따라 반도체가 사양산업으로 곤두박질할 일은 없다는 기대감이 반도체학과 선호현상을 더욱 키웠다.

이쯤 되면 이공계 인재 확보에 마침내 청신호가 켜졌다고 볼 법하다. 하지만 그렇게 판단한다면 큰 오산이다. 우선 의대 쏠림현상이 완화됐다는 분석은 순진한 착각이다. '의치한약수반'이라는 신조어는 학원 컨설팅에서 만든 마케팅 언어에 가깝다. 일부러 반도체학과 학원 수요를 끌어들이려고 '의치한반'이란 표현까지 동원한다.

슬그머니 약대와 수의대를 뒤로 밀어넣어 신규 학원 수요를 창출하려는 속셈이다. 설령 반도체 계약학과 열풍이 사실이더라도 우리나라의 입시관행이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최상위권의 의대 쏠림 구조에 반도체 관련 학과가 하나 더 추가됐을 뿐이다. 아예 반도체 계약학과가 의대 지망생을 대거 흡수했다는 증거는 없다. 성적이 되면 여전히 의대로 간다.

반도체 계약학과만 흥행한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취업계약을 맺은 주요 명문대의 '반도체 계약학과'가 수혜를 누릴 뿐이다. 요즘 일반 컴퓨터공학과, 전기전자공학과, 소재공학과 졸업생들의 취업문은 바늘구멍이다. 인문계 졸업생들이 망하고 이공계 전성시대가 왔다는 말도 AI 도입 이후 옛말이 돼버렸다. 반도체학과 수혜가 주요 이공계 전공으로 퍼지진 않았다는 말이다.

이공계 선호도를 만족시키는 곳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이라는 점도 뼈아픈 대목이다. 우리나라 취업시장의 고질적 문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격차다. 격차가 두배 난다는 조사도 있다. 계약학과 열풍은 이런 심리적 박탈감을 더욱 심화시킨다. 대학 시절부터 입도선매로 아름다운 인생을 보장받는 자는 일부에 불과하다. 반면 중소·중견 반도체 기업들은 인력난에 허덕이면서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더욱 고착화된다.

반도체 계약학과의 선전은 분명히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이공계 부활의 신호탄으로 읽기엔 이르다. 대기업 한두 곳의 성과급 잔치 소식은 다수의 직장인 혹은 취업준비생과 무관하다.
특정 엘리트에 국한될 뿐이다. 이 열풍이 신기루인지 아닌지는 반도체 사이클이 꺾이는 날 판가름 난다. 불황의 파고 속에서도 반도체 관련학과 경쟁률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때 비로소 이공계 부활을 알리는 진짜 신호탄이라고 불러도 늦지 않다.

jjack3@fnnews.com 조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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