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세 권 먼저 낸 뒤 등단...최중영, 늦게 열린 시인의 길

파이낸셜뉴스       2026.05.07 15:21   수정 : 2026.05.07 15:21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오롯이 제 감정에만 파묻혀 시를 써왔습니다. 전문가에게 평가를 받아 당선됐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웠지만, 결국은 행복했습니다.

"

열여섯살, 한 시골 소년이 고향을 떠나 홀로 서울로 올라왔다. 낯선 도시였다. 기댈 곳도,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었다. 그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살아가는 것이 두려워 유언장 같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글들은 오랜 시간 쌓여 한 사람의 삶이 됐고, 결국 한 시인을 만들었다.

최근 한국문인협회 대전광역시지부가 발간하는 '대전문학' 제46회 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며 공식 등단한 최중영 시인(68)은 통상적인 의미의 '신인'과는 결이 다르다. 이미 '젊음의 자화상' '봄별 아래 펜을 들고' '장어의 꿈' 등 세 권의 시집을 먼저 세상에 내놓은 뒤 뒤늦게 문단의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문학과 거리가 먼 곳에서 시작됐다. 이공계를 전공한 그는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 전자부품 제조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해 임원 자리까지 올랐다. 이후에는 동종 업계에서 창업해 LED 분야 기술을 기반으로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 제조업체를 운영했다. 산업 현장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온 시간이었다.

그러나 삶의 방향은 예상치 못한 순간 바뀌었다. 사업 과정에서 건강상의 이유가 겹치며 그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충청북도 옥천으로 내려오게 됐다. 그에게 옥천은 단순한 귀촌의 공간이 아닌 멈춰 서서 삶을 돌아보게 만든 장소였다. 문학소년 시절부터 써두었던 글들을 하나씩 꺼내 읽고 정리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집이 만들어졌다.

최 시인은 "개인의 주변 정리를 하다 보니 예전에 써두었던 글들이 모여 시집이 됐다"며 "시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다 보니 시인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시는 목표를 향한 결과라기보다 삶의 흐름 속에서 축적된 시간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는 등단을 목표로 시집을 낸 것이 아니었다. 출판사의 권유로 신인문학상에 응모했을 뿐, 당선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세 권의 시집을 낸 뒤 맞이한 등단에 대해 그는 특별한 수식보다 담담한 표현을 남겼다. "한 인간의 삶의 발자취를 정리해보는 것이 가장 큰 의미였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꿈꿨던 것 하나를 늦게나마 이루게 된 데 대한 조용한 기쁨도 함께 전했다.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 역시 문학적 열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그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책을 읽었고, 살아남기 위해 글을 썼다. 그가 전한 "글을 쓴다는 것은 서울에서 살아남고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돌파구였던 것 같다"는 말에는 그 시절의 고독이 그대로 남아있다.

문학적 영향을 준 작가로는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를 꼽았다. 어린 시절 그를 흠모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고,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와 조병화 시인의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역시 그의 감수성에 깊게 남아 있다고 했다. 첫사랑에게 선물받은 조병화 시집을 붙들고 밤새 울었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이번 당선작 '스님, 불 들어가요' '뚝 버들' '지독한 사랑'은 서로 다른 장면을 담고 있지만, 그 중심에는 결국 '사랑'이 놓여 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랑에 굶주린 삶을 살아왔다고 털어놨다. 일찍 부모 곁을 떠났고,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사랑을 충분히 돌려드릴 시간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남겨진 결핍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의 바탕색이 됐다.

'스님, 불 들어가요'는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계룡산 신도안이라는 종교적 환경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 다비식을 직접 보며 성장했다. 작품 속에는 절간으로 보내진 여섯살 아이가 훗날 스님으로 열반하고, 먼발치에서 이를 바라보는 노모의 한 맺힌 사랑이 담겨 있다. 그는 "삶과 죽음의 교차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며 "그 안에는 부족한 사랑에 대한 갈증도 함께 숨어 있다"고 설명했다.

'뚝 버들'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감정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물속에 잠긴 채 살아가는 버드나무를 바라보며 그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 닮은 존재라고 느꼈다. 자연도 인간도 결국 생명과 사랑을 향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지독한 사랑'에서는 사랑을 시간과 시련을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감정으로 바라본다. 긴 겨울과 꽃샘추위 끝에야 봄이 오듯, 사랑 역시 아무런 시련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두고 "두 연인이 떨어져 있더라도 삶과 사랑은 변치 않길 바라는 마음"이라며 "우주의 원리와 인간 사랑의 이치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시인은 이번 당선작을 통해 자신의 시 세계 역시 달라지고 있다고 느낀다고 했다. 젊은 시절의 시가 일기장 같은 감정의 기록이었다면 지금의 시는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언어에 가깝다는 것이다. 특히 "노년의 길목에서 삶과 사랑, 행복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에게 시는 단순한 표현의 도구가 아니다. 때로는 삶을 기록하는 방식이고, 때로는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며, 동시에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연결하는 매개다. 최 시인은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가장 쉬운 방편"이라고 말했다.

현재 그는 옥천에서 귀촌 생활을 이어가며 자연 속에서 새로운 시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는 자연을 닮은 시, 도시에서 잃어버린 몸과 마음을 회복하게 하는 시를 쓰고 싶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시가 삶의 거친 기록이었다면, 앞으로는 보다 부드럽고 조용하게 인생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늦게 도착한 자리이지만 그의 시는 서두르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지나온 만큼 천천히, 그리고 깊게 스며든다. 시는 결국 한 사람이 지나온 삶의 시간이 어떻게 문장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기록이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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