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작품에 들어왔습니다"... 여성예술의 귀환, 감각 깨우다
파이낸셜뉴스
2026.05.08 04:00
수정 : 2026.05.08 04:00기사원문
리움 기획전 '다른 공간 안으로…'
1950~70년대 환경 예술 개척했지만
물리적 소멸과 미술사적 배제 이중고
정강자 등 11인 작품 재구성 및 복원
'집은 곧 몸''깃털의 방''무체전' 등
걷고 보고 느끼며 감상 이상의 체험
하나의 공간이자 경험이 되고 관람객들의 감각을 바꾸는 환경이 된다.
미술사가, 보존연구가, 유족 등이 협업해 다학제적 연구로 되살린 20년의 기록이 서울 용산에서 부활한다. 리움미술관은 기획전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을 오는 11월29일까지 선보인다고 7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환경 예술의 흐름을 개척했지만, 주류 미술사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던 여성 작가들의 작업을 재구성·복원해 보여주는 자리다.
전시의 핵심은 '복원'이다. 환경 예술은 태생적으로 보존이 어렵다. 전시장 안에서 설치되고, 관람객의 몸을 통해 완성되며, 전시가 끝나면 해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미술사는 회화와 조각, 남성 작가 중심의 서사에 치우쳐 있었고, 여성 작가들의 실험적 환경 작업은 작품의 물리적 소멸과 미술사적 배제라는 이중의 지워짐을 겪었다.
하우스 데어 쿤스트 예술감독 안드레아 리소니와 밀라노 MUDEC 관장 마리나 푸글리에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흩어진 서신, 도면, 사진, 비평 기사, 작가와 유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사라진 환경 작업을 되살렸다. 4년 넘게 이어진 다학제적 연구에는 미술사가, 보존연구가, 큐레이터, 테크니컬 디렉터 등이 참여했다.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당시 작품이 지녔던 감각적 조건과 미술사적 맥락을 현재의 전시 공간 안으로 다시 불러오는 작업이다.
출발점은 1956년 일본 아시야 공원에서 열린 '제2회 야외 구타이 미술전'에 소개된 야마자키 츠루코의 '빨강'이다. 붉은 비닐로 감싼 직육면체 구조 안으로 관람객이 몸을 낮춰 들어가면 안팎의 시선과 움직임이 붉은 빛 속에서 뒤섞인다. 전후 일본 아방가르드의 실험 정신이 응축된 이 작업은 환경 예술의 초기 사례로 꼽힌다.
브라질 작가 리지아 클라크의 '집은 곧 몸'은 관객이 작품을 통과하며 수정, 배란, 발아, 배출의 과정을 감각하게 하는 구조다. 신체 내부와 외부, 집과 몸, 작품과 관람자의 경계를 허무는 이 작품은 조각이 더 이상 정지된 물체가 아닌 몸의 경험을 통해 완성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디 시카고의 '깃털의 방'은 남성 중심 미니멀리즘이 즐겨 사용하던 차갑고 단단한 재료와 다른 감각을 제안한다. 거위털과 다운으로 채워진 공간은 무게와 경계가 사라지는 듯한 감각을 만든다. 단단한 건축적 질서에 맞서는 부드러움의 공간이다.
리움미술관 전시가 갖는 특별한 지점은 한국 여성 작가 정강자의 '무체전'을 새롭게 포함했다는 점이다. '무체전'은 1970년 국립공보관에서 열린 정강자의 첫 개인전이자, 한국 여성 작가가 시도한 초기 환경 미술의 중요한 사례다.
검은 장막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관객이 들어서면 사이렌이 울리고 연기가 흘러나오며, 조명과 작가의 목소리가 관람객들을 감싼다. "여러분은 지금 나의 작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라는 선언은 관객을 작품 밖의 감상자가 아니라 작품 내부의 참여자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이 작업은 전시 도중 강제 철거됐다. 정강자와 제4집단이 준비한 판토마임, 해프닝, 선언문 발표 등은 당시 전위예술을 불온하게 바라보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중단됐다. 리움은 이번 전시에서 고증을 거쳐 '무체전'을 다시 구성했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신체, 행위, 공간, 소리, 빛을 결합한 여성 작가의 실험을 다시 읽게 하는 복원이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이번 전시는 여성 작가들을 단순히 재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의 작업 없이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이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여성 작가들의 복원을 넘어 현대미술이 물질에서 경험으로 이동한 과정을 짚는다"고 평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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