쇳물과 물감 던져 올려… 손 뗀 순간 시작된 예술

파이낸셜뉴스       2026.05.15 04:00   수정 : 2026.05.15 04:00기사원문
리안갤러리 윤희 'Improvisation'展
예측 불가능한 물질의 움직임 표현
힘의 강약·던지는 속도 등과 맞물려
단 한 번 발생한 조형적 사건에 초점
"무질서 아닌 통제 너머의 가능성들"

뜨겁게 녹은 금속이 허공으로 튄다. 중력에 이끌린 쇳물은 흩어지고 엉겨 붙은 뒤, 순식간에 식어 하나의 형상이 된다. 화면 위에 던져진 물감도 다르지 않다.

흐르고 번지고 멈추는 사이, 작가의 몸과 물질이 만난 찰나가 작품으로 남는다.

즉흥적 작업 방식과 물질에 대한 탐구를 조각과 회화 신작을 통해 조망하는 전시가 서울 종로에서 열린다. 리안갤러리 서울은 다음달 30일까지 윤희 개인전 'Improvisation'을 개최한다고 14일 밝혔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오랜 시간 이어온 즉흥적 작업 방식과 물질 탐구를 조각과 회화 신작을 통해 조망하는 자리다.

윤희 작가에게 '즉흥'은 즉각적인 충동이나 무계획의 결과가 아니다. 오랜 경험과 감각이 축적된 상태에서 순간의 변화에 반응하는 고도의 집중에 가깝다. 작가는 물질을 완전히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통제와 우연, 개입과 수용 사이에서 발생하는 흐름을 받아들이며 작업을 전개한다.

그의 조각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용융된 금속이다. 쇳물은 온도와 무게, 속도와 중력에 따라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움직인다. 윤희 작가는 이 불확실한 물질의 흐름에 몸으로 반응한다. 거리와 자세, 힘의 강약, 던지는 속도는 금속의 밀도와 맞물려 하나의 조형적 사건을 만들어낸다.

전시장 1층에 놓이는 신작 'Improvisation'은 기존 쇳물 작업의 연장선에서 구조적 변화를 시도한 작품이다. 작은 원뿔 형태를 기본 구조로 삼고, 금속이 녹아 흐르다 응고되는 찰나의 형상들을 포착해 접합했다. 작품은 섬세하고 연약한 인상을 주지만, 공간 안에서는 날카로운 긴장감을 형성한다.

함께 소개되는 'Creuse'는 쇳물을 공중으로 던져 올리는 반복 행위에서 출발한다. 흩어진 금속은 때로는 파편처럼 보이고, 때로는 서로 엉겨 붙으며 새로운 덩어리를 이룬다. 그 안에는 작가의 몸짓, 물질의 저항, 짧은 시간 안에 발생한 수많은 변화가 응축돼 있다.

이 과정에서 물질은 수동적인 재료에 머무르지 않는다. 쇳물은 작가의 의도에 반응하면서도 스스로의 물리적 조건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만든다. 윤희 작가의 조각이 견고한 구조물이라기보다 중력과 흐름, 응집과 확산이 남긴 흔적으로 읽히는 이유다.

지하 1층에서는 회화 신작들이 소개된다. 윤희는 붓으로 화면을 차분히 채워나가는 방식보다 물감을 붓고, 뿌리고, 던지는 행위에 가깝게 작업한다. 화면 위에서 물감은 흘러내리고 튀어 오르며 번진다. 윤희 작가는 그 움직임을 억누르기보다 따라가고 다시 개입하며 화면을 구축한다.

그의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완성된 이미지보다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계산된 구도보다 즉각적인 감각과 신체의 리듬이 앞선다. 윤희 작가의 호흡과 움직임은 끊기지 않는 흐름이 돼 화면 위에 남고,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새로운 형상이 떠오른다.

윤희 작가는 "때로는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그림이 나를 이끌고 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이는 작가가 물질을 지배하는 주체로만 서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작업은 작가와 물질이 서로를 밀고 당기는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이번 전시에서 조각과 회화, 드로잉은 분리된 장르로 제시되지 않는다. 쇳물의 흐름은 평면 위에서 다른 방식으로 되살아나고, 회화에서 발견된 감각은 다시 조각의 구조로 이어진다. 서로 다른 매체는 하나의 질문을 반복한다. 행위와 물질이 만나는 순간, 무엇이 생성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윤희의 작업은 특정 대상을 재현하기보다 생성 자체에 집중한다.
완성된 형태보다 그 형태가 생겨나는 시간, 물질이 변형되는 순간, 몸의 감각이 흔적으로 남는 지점을 붙든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고정된 이미지라기보다 단 한 번 발생한 사건의 기록에 가깝다.

리안갤러리 서울 측은 "전시의 주제인 즉흥은 무질서가 아니라, 축적된 감각이 순간의 조건과 만나는 방식"이라며 "윤희 작가는 예측 불가능한 물질의 움직임을 통해 통제 너머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고 전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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