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 좋게 살아남은 여성이다"…'강남역 살인사건' 10년, 광주에선 여고생이 스러졌다
파이낸셜뉴스
2026.05.17 06:00
수정 : 2026.05.17 07:06기사원문
['묻지마 범죄'와 '여성혐오 범죄' 사이 던져진 질문]
'여성살해=여성혐오'로 보긴 어렵지만, 불안감은 여성들의 몫
강남역 포스트잇은 사라졌지만, 젠더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
2016년 5월, 한 살인사건 이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붙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문장들은 여성 안전과 범죄를 둘러싼 논쟁이 불거질 때마다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10주기를 맞아 당시 제기됐던 질문이 왜 여전히 반복되는지 짚어봤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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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여자라서 죽었다."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강남역 살인사건 10주기인 17일, '묻지마 범죄'와 '여성혐오 범죄'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범행 동기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사건을 성별 문제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다. 다만 여성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은 관련 통계와 추모 현장 발언 속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왜 여자가 계속 조심해야 하는지" …10번 출구에 붙었던 말들
강남역 살인사건은 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 공용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일면식 없는 남성에게 살해된 사건이다. 당시 피의자는 화장실에 들어온 남성들에게는 범행하지 않고, 여성이 들어오자 공격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건 직후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추모 포스트잇이 붙었다. 포스트잇에는 "대한민국 여성인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고 싶은 게 아니라, 잘 살고 싶어요" 같은 문구가 적혔다. "아무 이유 없는 살인이 아니었습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살해당한 겁니다"라는 문장도 있었다. "살女주세요"라는 문구는 당시 추모 공간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30대 여성 직장인 A씨는 "그때 포스트잇을 보면서 내 불안이 개인의 조심성 문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처음 했다"고 말했다. 그는 "밤길이나 화장실을 조심하라는 말은 많았지만, 왜 여자가 계속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없었다"고 했다.
강남역 사건 이후 반복된 갈등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판단하지 않았다. 피의자의 정신질환과 피해망상이 범행에 영향을 미쳤다는 취지였다. 반면 여성단체와 일부 시민들은 피해자의 성별을 사건의 맥락에서 분리해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지금도 반복된다. '묻지마 범죄'라는 표현은 범행 동기를 알 수 없거나 특정하기 어려운 사건을 설명할 때 쓰인다. 그러나 피해자의 성별과 사회적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반대로 범행 동기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30대 남성 직장인 B씨는 "여성이 불안하다는 말은 이해하지만, 모든 사건을 곧바로 여성혐오로 보는 건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 사건도 피해자를 도우려던 남학생이 크게 다쳤는데, 그런 부분까지 같이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광주 여고생 사건 뒤 다시 나온 질문
이런 논쟁은 최근 광주 사건에서도 다시 불거졌다. 지난 5일 0시 10분께 광주 광산구 한 도로에서 귀가하던 17세 여고생이 20대 남성에게 흉기로 살해됐다. 비명을 듣고 다가온 또 다른 남학생도 중상을 입었다. 경찰은 피의자를 살인·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했고, 14일 신상정보를 공개했다.
온라인에서는 "또 여성이 밤길에서 살해됐다", "광주 여고생 사건도 여성혐오 범죄로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강남역 사건 10주기와 시기가 겹치면서 추모 공간과 여성 커뮤니티에서는 두 사건을 함께 언급하는 글도 이어졌다.
다만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단정하기는 이르다는 의견도 있다. 일부 시민들은 "가해자가 약자로 보이는 대상을 골랐고, 그 대상이 여성이었다는 점을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10년 뒤에도 남은 '여성 불안'
이런 가운데 강남역 10주기 추모행동은 지난 11일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추모주간을 선포했다. 서울여성회 등 129개 단체가 참여했고, 이들은 17일까지 추모행동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추모 현장에서는 10년 전 포스트잇 문장이 다시 언급됐다.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말은 당시 여성들이 느낀 공포를 압축한 표현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문장이 다시 나오는 이유는 여성 대상 폭력 사건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교제폭력 살인, 불법촬영, 딥페이크 성범죄, 광주 여고생 살해 사건까지 각각의 사건은 성격과 경위가 다르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여성 안전에 대한 불안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는 반응이 이어진다.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은 야간 보행 조사에서도 나타난다. 통계청이 2024년 11월 발표한 '2024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13세 이상 인구 중 밤에 혼자 걸을 때 불안하다고 느낀 비율은 30.5%였다. 성별로 보면 여성은 44.9%, 남성은 15.8%였다. 야간 보행이 불안한 이유로는 '신문·뉴스 등에서 사건·사고를 접함'이 46.3%로 가장 많았고, '인적이 드묾' 26.4%, '가로등·CCTV 등 안전시설 부족' 16.9% 순이었다. 강남역 사건 뒤 포스트잇에 남았던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말이 10년 뒤에도 다시 읽히는 배경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포스트잇은 오래전 철거됐지만, 그 문장들은 사건이 반복될 때마다 다시 불려 나온다. 누군가는 이를 여성혐오 범죄의 기억으로 말하고, 누군가는 무차별 범죄를 성별 문제로만 보는 데 우려를 나타낸다.
30대 후반 여성 직장인 C씨는 "강남역(살인사건) 때는 내가 20대였고, 지금은 딸을 키우는 나이가 됐다"며 "그때 붙었던 포스트잇이 아직도 기사에 나오는 걸 보면 씁쓸하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혐오냐 아니냐를 두고 싸우는 동안에도 여자들의 불안감은 여전하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범행 동기와 대상 선택 과정을 함께 따져봐야 한다고 말한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여성혐오 범죄라는 규정에는 주관적 해석이 들어갈 수 있다"며 "사건의 핵심은 범인이 자신보다 약하다고 판단한 대상을 골랐는지, 실제 범행 동기가 무엇인지에 맞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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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g@fnnews.com 한승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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