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마일' 바닷길이 바꿔놓은 글로벌 에너지 지도

파이낸셜뉴스       2026.05.17 19:01   수정 : 2026.05.17 19:06기사원문
전세계가 두려워하는 호르무즈 봉쇄
중동원유 의존도 높은 아시아 직격탄
수입선 다변화, 국가적 핵심과제 등극
유럽도 우크라 전쟁 이어 2연타 위기
"탈원전은 전략적 실수" 뒤늦은 고백
대만·필리핀 등 원전·재생에너지 주목
中은 러시아와 협력해 공급망 안정화
세계 최대 태양광·풍력 투자 '선견지명'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2026년 2월 28일. 21마일(34㎞)이 세계를 멈췄다. 충격의 무게는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항공 공습이 이란을 강타하자 이란 혁명수비대가 전 세계가 두려워하던 카드를 역사상 처음으로 꺼내 들었다.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폭 21마일의 좁은 수로,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였다.

머스크(Maersk), 하팍로이드(Hapag-Lloyd) 등 세계 최대 해운사들은 즉시 해협 통항을 중단하거나 우회에 나섰다. 사흘 만에 유조선 150척 이상이 해협 밖에 닻을 내렸다. 해협을 통과하던 원유 물동량은 하루 2000만배럴에서 200만배럴 수준으로 급감했다. 현재는 사실상 통항이 마비된 상태다.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세계는 역사상 가장 큰 에너지 안보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강조했다.

■호르무즈 봉쇄…세계 경제 숨통 막혔다

전 세계가 다시 에너지 위기에 휩싸였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두 번째 대형 에너지 위기를 맞았고 중동 원유 의존도가 높은 한국·일본·중국 등 아시아 주요국들도 비상 대응에 나섰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는 '에너지가 곧 안보'라는 인식이 새로운 뉴노멀로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에너지 공급망 안정과 수입선 다변화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일본은 에너지 소비량의 85%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특히 중동 지역 석유 공급 의존도가 높다. 지난해 일본의 원유 수입량 가운데 94%가 중동 지역에 집중됐으며 이 중 대부분은 아랍에미리트(43%)와 사우디아라비아(39%)에서 들어왔다. 일본 최대 LNG 발전사 JERA는 현재 기준 7월까지 사용할 수 있는 LNG 재고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원유 소비량의 약 85%를 수입에 의존하는 인도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 직격탄을 맞았다. 중동산 원유 조달 차질과 국제유가 급등으로 무역적자·물가·루피화 가치가 동시에 흔들리면서 인도 정부는 러시아산 원유 확대와 전략비축유 활용 검토에 나섰다.

동남아시아도 위기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아세안의 원유 수입 55%가 중동에서 오며 이번 위기가 역내 에너지 최종 소비량의 최대 28%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이 위기가 아세안의 수입 비용을 월 33억6000만달러 늘릴 수 있으며 이는 2026년 예산 대비 3.4% 증가에 해당한다고 진단했다.

■유럽 덮친 두 번째 에너지 쇼크

유럽도 직격탄을 맞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또다시 에너지 안보 위기에 직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해 겨울을 지나며 유럽의 가스 저장률은 30%대 초반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유럽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카타르산 LNG와 중동산 항공유 공급 차질에 직면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유럽의 중동산 항공유 수입이 한 달 만에 하루 33만배럴에서 6만배럴 수준으로 급감했다고 분석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이번 사태를 "세계 원유시장 역사상 최대 혼란"이라고 평가하며 유럽 경제의 에너지 안보 불안이 다시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원전 다시 꺼내든 세계

이번 위기가 만든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에너지 안보 개념 자체의 재정의다. 냉전 이후 에너지 안보 논의는 주로 가격 안정성과 공급 다변화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단순한 공급선 다변화를 넘어 재생에너지, 전기화, 그리고 일부 국가의 원자력이 국가 안보 수단으로 재정의되는 계기가 됐다.

친환경 에너지의 상징과도 같았던 유럽은 원전 퇴출 시점을 조절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기존 원전이 안정적이고 저렴하며 저탄소 전력을 계속 공급할 수 있다면 조기 퇴출을 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원전이 난방·산업 부문의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고 재생에너지 확대 과정에서 전력망 안정성을 높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달 유럽의 탈원전 정책이 "전략적 실수"였다고 언급했다.

독일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탈원전을 추진해 2023년 마지막 원전을 폐쇄했지만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최근 탈원전 정책을 철회했다. 스페인도 2027년부터 원전 폐쇄를 추진 중이지만 에너지 기업들은 수명 연장을 요구하고 있다.

대만은 에너지 공급 불안 속에 폐쇄된 원전 2기의 재가동 검토 및 승인 절차에 착수했다. 필리핀도 2032년 첫 원전 가동을 목표로 한 핵발전 로드맵을 추진하며 한국과 원전 기술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재생에너지·전기화, 새로운 안보 전략

재생에너지도 다시 각광받고 있다. 필리핀은 미국·이란 전쟁 이후 LNG 가격이 급등하자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태양광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동남아 최고 수준의 전기요금과 높은 석탄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외국인 투자 규제를 완화했으며 UAE 마스다르, 프랑스 토탈에너지 등 글로벌 기업들의 대규모 태양광 투자도 이어지고 있다. 인도는 풍력·배터리저장장치(BESS) 프로젝트의 신속 인허가 정책을 추진 중이며 캄보디아도 전기차와 태양광 관련 세제 혜택 및 관세 인하 정책을 확대하고 있다.

EU는 에너지 안보 위기가 다시 커지자 긴급 에너지 대응 패키지인 'AccelerateEU'를 발표했다. 핵심은 중동과 러시아산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고 유럽 자체 에너지 생산 능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EU는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확대와 산업·교통 부문의 전기화, 전력망 투자 확대를 추진하기로 했다. 가스 공동 구매와 전략 비축 체계를 강화하고 필요 시 공동 비축유 방출도 검토하기로 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에너지 안보는 곧 경제 안보"라며 이번 사태가 유럽의 화석연료 수입 의존 위험성을 다시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중국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수년간 준비해왔다. 전기차 보급 확대에 보조금을 지원하고 국내 원유 생산을 늘리며 러시아와 협력해 에너지 공급망을 안정화한 것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 에너지 소비국이자 제조업 강국으로서 재생에너지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특히 중국은 약 9억배럴 규모의 전략비축유를 보유하고 있으며 원유 수입처도 49개국에 걸쳐 있다. 상위 5개 수입국 비중도 각각 20% 미만으로 특정 지역 의존도를 낮췄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로 연결되는 육상 파이프라인도 대안 공급 루트로 기능했다. 중국 가스 수입의 절반 이상은 해상이 아닌 육상 파이프라인을 통해 들어온다.


또 중국은 세계 최대 규모의 태양광·풍력 투자를 이어왔으며 지난해 신규 재생에너지 설비만 430GW 이상 추가했다. 전체 발전설비 기준 재생에너지 비중도 60%를 넘어섰다. 외신들은 이를 단순한 탄소중립 정책이 아니라 "수입 화석연료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국가안보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pride@fnnews.com 이병철 특파원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