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칸’에 분노하는 사회

파이낸셜뉴스       2026.05.19 18:09   수정 : 2026.05.19 18:13기사원문

서울의 한 빌라에 거주 중이다. 그런데 어느 날 늘 조용하던 입주민 단체대화방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빌라 주차장에 장애인전용주차구역이 한 곳 있는데 그곳에 주차했더니 누군가의 신고로 과태료 고지서가 날아왔다는 소식이었다.

빌라 입주민 사이에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빌라 입주민의 차량은 총 10대다. 빌라 총주차대수도 장애인전용주차구역을 포함해 총 10대다. 10년이 넘는 기간 장애인전용주차구역은 입주민 누구나 일반 주차구역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빌라에 장애인 입주민이 거주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능한 주차대수와 보유한 차량수가 같기 때문에 주차전쟁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르면 빌라(공동주택)의 경우 총주차대수가 10대일 경우 장애인전용주차구역 1곳 이상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 과태료 고지서가 날아온 이상 해당 장애인전용주차구역은 늘 비워 놓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며, 비상식적이고, 소모적인 규정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넉넉한 주차대수를 보유한 곳에 거주하는 이상주의자가 만든 규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내가 이상한 것인지, 주변인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결과는 반반이었다.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반, 당연히 이런 규정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 반. 온라인에서도 논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빌라처럼 주차구역이 많지 않은 곳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려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냈다. 실제로 서울의 주차전쟁은 심각하다.

서울시 주택가 주차장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주차장 확보율은 106.7%다. 서울시 내 차량이 총 10대라고 가정했을 때 주차대수가 10대면 100%다. 데이터로만 보면 모든 차량이 1개 이상의 주차장을 확보한 셈이 된다. 그러나 현실은 차이가 있다. 지역별 편중도 있고, 아파트 등 대규모 공동주택과 빌라가 밀집한 지역 등 거주형태에 따라서도 수치 차이가 크다. 지역별로만 봐도 주차장 확보율이 가장 높은 은평구는 133.5%를 기록했지만, 가장 낮은 영등포구는 86.0%였다.

내 의견과 다른 사람들은 '지금 안 쓴다'는 것이 '앞으로도 필요없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다. 필요할 때 임시로 만드는 게 아니라 미리 확보를 해야 실제 이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꼭 입주민이 아니어도 빌라 방문객 누군가가 장애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장애인 입장에서 어딘가를 방문할 때 주차에 대한 부담감을 없애는 것만으로 이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고, 이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 대부분의 시설이 이른바 '평균적인 몸 상태'를 기준으로 설계됐다는 점에서 장애인주차구역은 '특혜'가 아니라 최소한의 접근조건을 맞춰주는 장치라는 의견도 있었다. 키 작은 사람을 위한 낮은 버튼, 유모차용 경사로, 노약자용 엘리베이터 등과 같은 개념이다. 더 나아가 이동권을 보장받아야 하는 대상이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양쪽 의견을 깊이 고민한 결과 우리 빌라에 장애인전용주차구역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다만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여유와 공감이다.
건물 입구에서 뒷사람을 위해 문 손잡이를 잠깐 잡아주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매너 중 하나가 됐다.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버스를 타고 내릴 때, 지하철을 오르내릴 때, 이들을 위한 여유와 배려가 필요한 것처럼 빌라의 장애인전용주차구역이 늘 비어 있어도 불편해하지 않는 여유와 공감을 나부터 갖춰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여유와 공감이 우리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ronia@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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