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창살'
파이낸셜뉴스
2026.05.25 19:07
수정 : 2026.05.25 19:07기사원문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지위와 가치는 사회가 정한 기준에 따라 배분된다. 이러한 '성과 사회'의 논리가 개인의 내면에 침투할 때, 현대인은 외부의 강압 없이도 스스로를 노예처럼 부린다. 한병철 교수가 제시한 '피로사회'도 이를 가리킨다.
하루하루 숨 가쁜 질주 속에서 우리는 문득 베르테르를 떠올린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떠나오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라는 해방감 넘치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는 왜 친구와 도시를 뒤로하고 자연으로 향했을까. 그곳에서 만난 롯테와의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18세기 중반 루소와 동시대를 살았던 괴테는 이 철학자의 사상을 소설로 형상화했다. 겉으로만 보면 이 작품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이지만 깊은 곳에는 도시와 자연의 대립을 통해 근대 문명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 있다. 주인공은 규범과 격식, 신분 질서라는 문명화가 지배하는 질식할 것 같은 도시를 떠나 '살아있는 자연'과 교감하고자 했다. 그에게 자연은 영혼의 순수성과 사랑의 원형이었고, 이는 롯테와의 만남으로 표현된다. 무도회에 갔다가 밤이 되어 뇌우가 몰려오고, 비에 젖어 생명력을 더해가는 창밖의 자연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함께 눈물을 흘리며 깊은 영적 교감을 나눈다.
그러나 베르테르를 기다리는 현실은 냉혹했다. 롯테에게는 약혼자 알베르트가 있다. 그는 합리성과 근면성으로 대변되는 문명의 세계를 상징하는 인물로, 베르테르와 대척점에 서 있다. 베르테르는 어쩔 수 없이 도시로 돌아가 공사관 직원이 되지만, 그곳에서 겪는 좌절은 현대인이 겪는 기성의 제도와 현실에서의 소외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신분의 벽, 상관의 고압적 태도, 기계적 일상 속에서 그는 "나를 괴롭히는 것은 질식할 것 같은 시민사회의 관계들"이라며 절규한다. 그가 마주한 벽은 인간의 생명력을 메마르게 하는 근대 관료제와 합리성의 세계였다. 결국 그는 롯테를 찾아 발하임으로 되돌아오지만 그녀는 이미 알베르트와 결혼했고, 꿈꾸었던 사랑은 이루지 못한다.
막스 베버는 개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이 냉혹한 질서의 기원을 밝힌다. 근면과 성과를 강조하는 자본주의 정신은 본래 종교적 경건함에서 출발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영혼은 사라지고 효율성만 남았다. 그래서 인간은 영혼 잃은 전문인, 심장 없는 향략인이 되어 '철창'에 갇히게 된다. 루소의 선언이나 베르테르의 절규도 이를 가리킨다. 베르테르는 자신이 창살이 쳐진 감옥에 갇혀있다고 느끼는데, 마찬가지로 현대인도 성과지표라는 이름의 현대적 창살을 경험하고 있다. 이 창살에서 벗어날 때 베르테르의 슬픔은 멈출 것이다. 그때 우리는 루소가 꿈꿨고 베르테르가 갈구했던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김길웅 성신여대 인문융합예술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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