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은 임신을 한 것이 아니라 귀태(鬼胎)였다
파이낸셜뉴스
2026.05.30 06:00
수정 : 2026.05.30 06: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주>
부인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삼신할미께 새벽마다 정한수 한 그릇을 떠다 놓고 두 손 모아 비손했다. 그리고 절에서 백일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잉태는 되지 않았고 부인은 극심한 상심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가 싶더니 드디어 4년 만에 월경이 끊겼다. 부인은 음식 먹기를 싫어하고 헛구역질까지 했다. 본인도 그렇고 집안사람들은 이를 임신에 의한 입덧이라고 생각했다.
삼사 개월쯤 지나자 뱃속에 약간 태동 같은 움직임이 있었고 배도 점차 불러왔다. 그런데 부인은 체중이 늘어야 했지만, 오히려 몸이 몹시 야위고 기운도 쇠약해졌다. 아홉 달이 되어도 분만의 징후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은 동네 의원들을 불러 진찰하게 했다. 그러나 진찰을 했던 의원들은 모두 도대체 무슨 병명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진단이 되지 않으니 처방도 하지 못했다.
집안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멀리 떨어진 곳에 명의로 소문난 의원에게 치료를 요청했다. 의원이 왕진을 해서 진맥을 보니 임신맥인 활맥(滑脈)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가늘고 깊은 맥이 잡혔다. 의원은 "부인은 임신한 것이 아닙니다. 귀태(鬼胎)입니다."라고 했다. 집안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귀태란 직역하면 '귀신 태아'라는 의미다. 배는 불러오며 움직임까지 느껴지는데 오래도록 출산이 안 되고 아이가 나오지 않는 경우를 기괴하게 여겨 이를 귀태라고 불렀다. 임신처럼 보이지만 실제 임신은 아닌 것이다. 상상임신이거나 자궁이나 난소 부위에 종괴가 생겨서 나타나는 증상이기도 하다.
의원은 부인이 간기(肝氣)가 울결(鬱結)된 것으로 보고 <만병회춘>의 가미소요산(加味逍遙散) 열 첩을 써서 경과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부인은 탕약을 복용하고서는 복통이 심해서 고통스러워했다.
의원은 다시 왕진을 와서는 부인의 배를 복진했다. 그랬더니 뱃속에 주먹만한 크기의 덩어리가 만져졌다. 의원은 '담적(痰積)이나 식적(食積)이로구나.'라고 여겼다.
의원은 고민 끝에 가미시평탕(加味柴平湯) 십여 첩을 처방했다. 그러자 복통이 점차 줄어들고 음식도 조금씩 잘 먹게 되었으며, 일어나 움직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덩어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시 열다섯 첩을 더 복용하게 하였더니 그 덩어리도 마침내 흩어져 없어졌다.
시평탕(柴平湯)은 소시호탕(小柴胡湯)과 평위산(平胃散)을 합방한 처방으로 간의 울체(鬱滯)를 풀어주면서 비위(脾胃)의 담습(痰濕)과 식적(食積)을 제거하는 처방으로 활용된다.
의원은 다행스러워하며 집안 사람들에게 "옛사람이 말하기를 여인 한 사람을 치료하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저도 부인의 치료에 애를 먹었습니다."라고 하면서 껄껄껄 웃었다.
집안 사람은 의원에게 "의원님, 정말 고맙습니다. 혹시 전에도 이런 경우를 치료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제가 젊었을 때에도 이판서 대감댁의 생질녀를 치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슴과 횡격막 아래에 막힌 덩어리가 있었는데 마치 뒤집어 놓은 기와장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물 한 모금을 마셔도 반드시 세 번에 나누어 삼켜야 할 정도로 증상이 몹시 괴롭고 심했죠. 그러나 가미시평탕을 복용하고 조리한 뒤에는 편안히 나았습니다."라고 했다.
이판서의 생질녀는 아마도 기능성 위장장애나 위장관 운동 이상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다. 극심한 스트레스나 불안, 신경성 위장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명치 부위 근육과 횡격막 주변이 과도하게 긴장하면서 단단한 덩어리처럼 만져지기도 한다. 식도운동장애, 기능성 소화불량, 위경련, 담적 증후군과 유사한 상태였을 것이다.
집안 사람은 의원에게 "가미시평탕이란 처방이 참 좋은 처방 같습니다."라고 했다. 의원은 "대체로 시평탕(柴平湯)은 간을 소통시키고 비위를 다스리며 음식으로 생긴 담(痰)과 어혈을 제거합니다. 그래서 무릇 간열(肝熱)로 인해서 기운이 막히고 뭉쳐서 생긴 덩어리에는 이 약을 써서 효과를 보지 못한 경우가 없으니 참으로 좋은 처방입니다."라고 했다.
아마도 부인은 '가성임신'과 적취(積聚)가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성임신은 실제 임신이 아닌데도 생리가 멎고 배가 불러오며 입덧과 태동 같은 느낌까지 나타난다. 적취(積聚)란 배 속에 생긴 덩어리, 뭉침, 정체를 통칭하는 병증이다. 임신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기(氣)와 담(痰), 식적(食積), 어혈(瘀血)이 서로 엉겨 병리적 덩어리가 생긴 것이다.
부인이 의원으로부터 치료를 받고 난 이후 건강을 회복하자 집안 사람들은 부인에게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말은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그랬더니 한두 해가 지나자 부인은 마침내 자연스럽게 잉태되어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역시만필(歷試漫筆)>崔生內室, 曾生一子, 四年後, 忽經閉數朔, 食飮厭進, 且有嘔惡, 其家疑其胎候, 亦涉惡阻症也. 逮至三四朔, 微有動氣, 至腹漸高若胎, 當九朔尙無顯然. 邀余診察, 元非胎脉, 形柴氣憊, 用回春加味逍遙散十貼, 以觀其形勢, 則少無加減. 腹痛苦谻, 使之按探腹部, 則腹中顯有結塊, 大如拳者, 用加味柴平湯十餘貼, 痛勢漸輕, 食飮差勝, 能起居動作. 但塊不消融, 更加進十五貼, 則塊亦消散. 古人所謂, 難醫一婦人者, 誠然矣. 余少時, 嘗治李判書甥姪女, 得胷膈下痞塊, 若覆瓦狀, 飮水一口, 必三嚥而下, 症甚苦惡, 服右藥調治而安. 盖柴平湯踈肝理脾, 治食痰死血, 然凡痞塊有熱者, 服此無不得效, 眞良方也. (최생의 부인이 일찍이 아들을 하나 낳은 뒤, 4년 후 갑자기 몇 달 동안 월경이 멎었다. 음식 먹기를 싫어하고 구역질까지 하자 집안사람들은 임신한 것으로 여겼고, 입덧 증상이라고 생각했다. 삼사 개월쯤 지나자 약간 태동 같은 움직임이 있었고 배도 점점 불러와 임신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아홉 달이 되어도 분만의 징후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나를 불러 진찰하게 했는데, 본래 임신맥이 아니었다. 몸은 몹시 야위고 기운도 쇠약하였다. 그래서 『만병회춘』의 가미소요산 열 첩을 써서 경과를 지켜보았으나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이후 복통이 심해 몹시 괴로워하였기에 배를 눌러 살펴보게 했더니 뱃속에 뚜렷한 덩어리가 있었는데 크기가 주먹만 했다. 가미시평탕 십여 첩을 쓰자 통증이 점차 줄어들고 음식도 조금씩 잘 먹게 되었으며, 일어나 움직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덩어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기에 다시 열다섯 첩을 더 복용하게 하였더니 그 덩어리도 마침내 흩어져 없어졌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여인 한 사람 치료하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내가 젊었을 때에도 이판서의 생질녀를 치료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가슴과 횡격막 아래에 막힌 덩어리가 있었는데 마치 뒤집어 놓은 기와장 같은 모양이었다. 물 한 모금을 마셔도 반드시 세 번에 나누어 삼켜야 할 정도로 증상이 몹시 괴롭고 심했다. 그러나 위의 약을 복용하고 조리한 뒤에는 편안히 나았다. 대체로 시평탕은 간을 소통시키고 비위를 다스리며 음식으로 생긴 담과 죽은 피를 치료한다. 무릇 열을 동반한 비괴에는 이 약을 써서 효과를 보지 못한 경우가 없으니, 참으로 좋은 처방이다.)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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