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 공법으로 빚어낸 차세대 아연 배터리
파이낸셜뉴스
2026.06.10 05:56
수정 : 2026.06.10 05:56기사원문
<42> 한국에너지공대 서동한 교수팀
물·알칼리 금속 공삽입으로 효율 극대화
제조 에너지 10분의 1로 대폭 아껴
이태용 연구원·최선우 석사과정생 주도
택배 상자를 열 때의 설렘, 기억하시나요? 대학 연구실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을 바꿀 놀라운 발견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논문'이라는 두꺼운 포장지에 쌓여있을 뿐이죠. '언박싱 연구실'에서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 대신, 여러분이 알고 싶은 알맹이만 쏙 골라 담겠습니다. 자, 그럼 상자를 열어볼까요? 오늘 언박싱할 주인공은 바로 이 연구입니다.
■ 리튬 대체할 구원투수
우리가 스마트폰이나 전기차에 흔히 쓰는 리튬 이온 배터리는 매장량이 부족해 가격이 비싸고, 무엇보다 불이 나거나 폭발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반면 물 성분의 전해질(액체)을 쓰는 '수계 아연 이온 배터리'는 대량 생산이 쉽고 불이 나지 않아 훨씬 안전한 차세대 대용량 에너지 저장 장치(ESS)로 주목받고 있다.
■ 번개처럼 빠른 제조법
그동안 배터리 속 신소재를 만들 때는 아주 높은 온도에서 수많은 시간 동안 열을 가해야 해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낭비되곤 했다. 이 높은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연구팀의 이태용 연구원과 최선우 석사과정생은 '플라즈마 기반 수열 합성법(PAHT)'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초고속 공법을 실험실에 도입했다.
여기서 '플라즈마'란 대자연의 번개나 형광등 속 빛처럼 기체가 엄청난 에너지를 받아 찌릿찌릿하게 활성화되어 빛나는 상태를 말한다. 이 플라즈마를 액체 상태의 원료 물질에 순식간에 쏘아주면, 에너지가 넘치는 입자들이 아주 낮은 온도(80℃ 이하)에서도 원료들을 분자 수준에서 산소와 빠르게 결합(산화)시키며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두 제자는 단 10분 동안 플라즈마를 노출시킨 뒤 1시간 동안만 열처리를 거쳐 최종 소재를 완성해 냈다. 전체 제조 시간이 단 70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기존 학계의 방식들과 비교했을 때 제조 에너지를 무려 10분의 1 수준으로 대폭 아낀 획기적인 결과였다.
■ 숨은 능력치 90% 충전
과학계에서 '이론 용량'이란 소재가 가진 잠재력을 100% 쥐어짜 냈을 때 저장할 수 있는 과학적인 한계치를 뜻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리튬 이온 배터리의 일부 소재들은 안전을 위해 원래 가진 능력의 절반 수준(약 50%)만 꺼내 쓰도록 설계되기도 한다. 무리하게 용량을 다 쓰려고 하면 배터리 구조가 무너져 화재나 폭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의 주인공인 바나듐 산화물은 이론적으로 매우 높은 전기 저장 용량을 가졌음에도, 통로가 너무 좁아 아연 이온이 몇 번 드나들면 구조가 쉽게 찌그러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태용 연구원과 최선우 석사과정생은 이 좁은 통로에 물과 알칼리 금속을 채워 넣어 구조를 대폭 넓히고 단단하게 고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구조가 파괴될 걱정 없이 소재가 가진 숨겨진 능력치를 무려 90%까지 극한으로 끌어올려 전기를 꽉꽉 채워 담을 수 있게 됐다. 학계에서 이번 연구 성과를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4000번도 끄떡없다
연구팀이 플라즈마로 빚어낸 배터리 양극 소재 내부를 정밀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종이가 구겨진 것처럼 입체적인 나노 시트 다발 구조를 띠고 있음이 확인됐다. 이러한 구조적 특징은 배터리 성능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소재 내부에 물 분자와 알칼리 금속이 나란히 들어가 박히면서 덩치가 큰 아연 이온들이 오고 갈 수 있는 이온 고속도로 통로가 아주 넓게 확장됐다. 연구팀이 리튬, 나트륨, 포타슘 등 다양한 알칼리 금속을 테스트한 결과 포타슘(칼륨)을 넣은 소재가 단연 압도적인 성적을 냈다. 1g당 526.7mAh라는 매우 높은 용량을 기록했는데, 이는 바나듐 산화물이 과학적으로 낼 수 있는 한계치인 이론 용량의 약 9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내구성 또한 대폭 향상됐다. 이 배터리는 무려 4000번이나 연속으로 충전하고 방전해도 처음 용량의 94.5%를 그대로 유지하는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연구팀은 컴퓨터 이론 계산을 통해 유독 포타슘이 뛰어난 성능을 낸 비결을 추가로 분석했다. 포타슘과 물이 결합할 때 구조가 가장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최대 3개의 아연 이온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기 때문임이 과학적으로 명쾌하게 증명됐다.
물과 알칼리 금속의 완벽한 복합 시너지 덕분에 배터리의 용량은 극대화하고 구조적 붕괴는 단단하게 막아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실험실에서 묵묵히 연구에 매진한 이태용 연구원과 최선우 석사과정생의 노력이 만들어낸 이 짙은 녹갈색의 신소재 분말이 인류의 친환경 에너지 미래를 한 걸음 더 앞당기고 있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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