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고려인 잊힌 독립운동 후예 향한 국가 책무

파이낸셜뉴스       2026.06.12 15:40   수정 : 2026.06.12 15:4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재단법인 그린닥터스 봉사단이 최근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일대에서 의료봉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현장에서 마주한 고려인 동포들의 눈빛은 반가움 이면에 깊은 아픔을 머금고 있었다. 스탈린 시대 강제이주라는 역사적 비극을 온몸으로 버텨낸 이들은 1990년대 러시아 정부의 사과 이후 다시 연해주로 돌아와 삶의 뿌리를 내리려 처절하게 애쓰고 있다.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1만6000여명에 이른다.

이곳엔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진실이 있다. 이들의 선조는 일제강점기 당시 '페치카(난로)'로 불린 최재형 선생을 중심으로 이동휘, 이상설, 안중근 의사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품고 키워낸 항일 투쟁의 숨은 버팀목이었다.

극동 러시아는 단순한 망명지가 아닌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으며,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피땀 어린 재정과 정보, 은신처를 아낌없이 제공한 주인공들이었다.

이번에 봉사단이 걸었던 크라스키노(옛 연추) 일대는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뜨거운 혈흔이 남아있는 성지다.

1909년 2월, 안중근 의사는 김기룡, 황병길 등 결사동지 11인과 함께 이곳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기원하며 왼손 무명지를 잘랐다. 이른바 단지동맹(斷指同盟)이었다. 생동하는 선혈로 태극기 위에 '대한독립'을 쓰고 만세를 삼창했던 그날의 결의는 오늘날 우수리스크에 외롭게 서 있는 단지동맹비로 간신히 증언되고 있을 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집단 거주지였던 '신한촌(新韓村)' 역시 마찬가지다.

이곳은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 등 망명정부의 기틀이 마련된 곳이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앞두고 마지막 전략을 논의했던 역사적 공간이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역사와 달리, 오늘날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절체절명의 소외 지대에 놓여 있다. 러시아 중앙정부의 투자에서 배제된 이 지역은 인근 중국 국경도시 훈춘과 비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낙후돼 있다.

도로, 학교, 병원 등 기초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하며, 의료 접근성은 열악하기 짝이 없어 민간 봉사단의 손길이 아니면 제대로 된 진료조차 받기 힘든 실정이다. 더 큰 비극은 이 거룩한 독립운동 유적지들마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채 풍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대한민국 정부와 시민사회가 답해야 할 때다. 연해주 고려인에 대한 지원은 단순한 시혜적 차원의 동포 정책을 넘어선다. 엄혹한 시절, 국가가 해주지 못한 독립운동을 가문과 삶을 바쳐 지탱해 온 '숨은 공로자'들에 대한 당연한 예우이자 국가의 책무다.

크라스키노의 단지동맹 거점, 우수리스크의 단지동맹비, 블라디보스토크의 이상설 선생 유허비와 신한촌 등 우리 독립운동의 성지들이 이대로 역사 속으로 묻히게 두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연해주 고려인 사회를 향한 지원과 협력은 미래 대한민국을 위한 가장 확실한 '전략적 투자'이기도 하다. 최근 2년간 크라스키노강이 얼지 않았을 정도의 기후변화와 기술 발전으로 북극항로가 본격적으로 개설되면 러시아 연해주는 동북아의 물류 흐름을 바꾸는 국제자유무역의 거점도시로 급부상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이 중요한 지정학적 요충지에 우리와 언어·문화적 뿌리를 공유하는 고려인 동포들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자원 외교와 국가 공급망 다변화 측면에서 엄청난 자산이다.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은 향후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 나갈 대한민국의 평화는 물론, 동북아 경제안보 체제를 구축하는 데 강력한 지렛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연해주 고려인 사회를 위해 보다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단기적인 원조를 넘어 지속 가능한 의료 지원 체계를 구축하고, 교육 협력과 중소기업 간 유치 등 실질적인 경제·문화적 교류를 서둘러야 한다.
이는 대한민국이 품격 있는 선진국으로서 보여주어야 할 국제적 책임이며, 냉각된 한러 관계의 숨통을 틔울 미래지향적 교두보가 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듯 독립운동의 후예를 외면하고 미래의 전략적 기회를 놓치는 국가에게는 도약도 없다. 연해주 고려인들이 흘리는 현장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 오늘날 번영을 누리는 대한민국이 져야 할 마땅한 의무이자 미래 세대를 위한 현명한 선택이다.

글·사진 = 임종수 그린닥터스 공보이사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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