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박원순은 누구인가?

이승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1.10.27 01:06

수정 2011.10.27 01:06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자는 1956년 3월 경남 창녕에서 평범한 농부의 2남 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경상도의 평범한 농촌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낸 박 당선자는 후일 부모님에 대해 “가난했지만 인생의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바치신 분”이라며 “평생 농촌에서 땅을 파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워 나를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들은 정직함과 성실함을 무엇보다 큰 유산으로 남겨 주셨다”고 술회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네 입에 밥 들어갈 때, 다른 사람 입에도 밥숟가락 들어가는지 살펴라“라며 아들이 타인과 공감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반듯하게 자라도록 뒷바라지 했다.

■노력하는 책벌레 그리고 개구쟁이
박 당선자는 어린 시절 공부 잘하는 책벌레였지만 “개구쟁이 노릇을 엄청 하며 자랐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 박원순 당선자는 자신이 희망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이루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는 면모도 보여주었다.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3개월 동안 두문불출하며 공부에만 열중한 이야기는 박원순 당선자의 노력가적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례이다.


■삶의 전환기 ‘긴급조치 9호’
박 당선자는 1975년 한 번의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그러나 입학한지 3개월 만에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를 반대하는 교내시위에 나섰다가 투옥되면서 일생의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다. 열아홉살의 양심수로 감옥에 갇힌 4개월여의 기간은 청년 박원순에게 사회를 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다양한 이유로 갇힌 수인들과 접하면서 ‘사회를 보는 눈’과 ‘죄를 짓는 환경’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의문을 풀기 위해 독서에 몰두했다. 그를 법조인으로 이끈 독일 법철학자 예링의 <권력을 위한 투쟁>과 사회를 보는 따뜻한 눈을 갖게 해준 <성경>도 이때 독파했다. 방대한 독서로부터 삶의 지혜를 얻는 그의 오랜 습관도 이때 형성된 것이다.

■‘사람 살리는’ 변호사
수형생활을 끝낸 그는 학교(서울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서울대는 그에게 제명처분을 내렸고 그는 1976년 단국대 사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재학 중에 사법시험을 준비해 1980년 제22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박원순 당선자 사시-사법연수원 동기다. 1982년 박원순 당선자는 대구지검 검사로 첫 발령을 받고 본격적인 법조인의 길에 접어든다. 그러나 검사 생활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사람 잡아들이는 일’보다는 ‘사람 살리는 일’이 그의 체질에 맞는 일이었다. 그는 검사생활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그의 천성대로 ‘사람 살리는’ 변호사로서의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한다.

변호사의 길에 들어서면서 그의 일생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과 만나게 된다. 바로 故 조영래 변호사와의 만남이다. 박 당선자는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권인숙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구로동맹파업 사건’ 등을 맡아 인권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박 당선자의 선거운동본부장을 맡았던 이인영 민주당 최고위원도 학생운동 시절 박 당선자의 변론을 받았다. 故 조영래 변호사와 박 당선자는 뜻을 같이하는 인권변호사들과 함께 ‘정법회’라는 모임을 결성했고, 이 모임은 2년인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으로 확대 개편됐다. 박 당선자는 민변의 창립 멤버로 활동, 인권변호사로서는물론 어떤 사건이든지 한번 맡게 되면 끝을 보는 성실한 성격 탓에 변호사로서 매우 좋은 평판을 얻게 됐다. 박 당선자는 이 시기를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나는 어느새 부자가 되어 있었다.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탔고, 다른 사람들은 뭔지도 모르는 휴대전화를 사용했고, 제법 큰 단독 주택에서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 영국 유학 그리고 참여연대 설립
한참 잘나가는 변호사로 주가를 올리던 그에게 다시 한 번 일생의 중요한 전기가 찾아온다. 1990년 12월 그의 영원한 멘토이던 조영래 변호사의 죽음이 그의 삶을 다시 한 번 새 길로 이끌었다. 임종을 맞기 전 병상에 있던 조영래 변호사는 “박 변호사,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이제 좀 눈을 돌려봐”라고 멘토로서 마지막 조건을 건넨다. 세속적인 성공의 길을 가던 박 당선자는 브레이크 없는 성공의 열차에서 내리기로 결정한다. 박 당선자는 조영래 변호사가 작고한 다음해인 1991년 8월 집을 팔아 역사문제연구소에 기부하고 돌연 영국 유학을 떠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 때의 심경에 대해 박 당선자는 “'탐욕'이라는 열차에 올라타 있던… 나는… 열차에서 내리면서 세상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우선 물질에 대한 집착이 없어졌다”고 회고했다.

영국 정경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의 2년여 유학은 사회를 바꿔가는 시민의 역할과 다양한 시민참여, 시민운동의 사례들을 직접 보고, 공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시민참여, 시민운동의 모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귀국한 이후 박 당선자는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과 함께 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했다.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성공한 변호사에서 현장의 활동가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참여연대는 우리 사회를 깨끗하고 합리적인 사회로 바꾸기 위해 인권침해의 우려가 있는 각종 제도와 관행을 바꾸기 시작했고, 소액주주운동, 반부패 투명사회운동, 조세개혁운동, 부적절한 국회의원 낙천 및 낙선운동을 통해 한국 시민운동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갔다.

박 당선자는 참여연대의 사무처장, 상임 집행위원장을 맡아 일하면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상가임대차보호법’ 등 민생 법안을 시민 서명을 받아 청원하고 정당과 정부를 움직여 입법화하는 개가를 거뒀다. 또한 당시 정부가 지급하지 않고 있던 노령연금 반환소송을 승리로 이끌어 노인들에게 노령수당을 되돌려 주기도 했다. 특히 당시 우리 사회에서는 생소하던 “생활최저선”의 개념을 도입해 복지가 확산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만든 것도 박 당선자의 중요한 성과이다.

■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참여연대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자 그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2000년 1% 나눔운동을 위한 아름다운 재단설립이 그것이다. 그의 노력으로 나눔의 생활화라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름다운 재단이 궤도에 오르자 그는 중고 생활용품을 기증받아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가게(2006년), 제3세계 가난한 농부들을 돕는 공정무역 커피회사 ‘아름다운 커피’(2009년)를 연이어 설립했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수익을 낼 수 있는 사회적 기업의 모델을 창출한 것이다. 아름다운 가게는 현재 전국 120여 개의 매장에서 연매출 250억원, 아름다운 커피는 30억원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이들 사회적 기업의 성공사례는 세계 각국의 시민활동가들에게 훌륭한 영감을 주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그의 열정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는 살아있는 아이디어로 현실적 대안을 만들어 실천하는 싱크탱크인 ‘희망제작소’(2006년)를 설립하면서 시민의 실생활을 바꾸는 작고 강한 노력을 시작한다. 지하철 키높이 손잡이, 수영장 생리할인, 과자류 제조일자 표기 등 실생활로부터 시민의 삶을 개선해 나간다.
‘희망제작소’는 21세기 실학운동에 비견되어 ‘대한민국 최고의 씽크탱크’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 시민운동가에서 사회문화를 선도하는 혁신가로 변모에 변모를 거듭해 온 박원순 당선자는 ‘서울시장’에 출마하며, 또 다른 변화와 혁신을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


‘서울시장 박원순’이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시민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약력>
1956년 3월 26일 경남 창녕 생
1974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75년서울대학교 사회과학계열 입학
1975년서울대학교 사회과학계열 제명
1979년단국대학교 사학과 졸업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 대구지검 검사
―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 참여연대 사무처장
― 아름다운재단 총괄상임이사
― 아름다운가게 총괄상임이사
― 포스코 사외이사
―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relee@fnnews.com 이승환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