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구상나무 '풍년의 역설' 첫 규명… 열매 많을수록 속 빈 씨앗 늘었다
세계유산본부·국립백두대간수목원 공동 조사
2022년부터 5년간 10개 조사구 100그루 분석
엑스레이로 종자 충실률 확인
2025년 대풍해 충실률 30~40%대 하락
발아율 연계 종자 품질 표준 지표 만든다
【파이낸셜뉴스 제주=정용복 기자】 한라산 멸종위기종인 구상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는 해일수록 씨앗 속은 오히려 비는 현상이 처음 확인됐다. 겉으로 보기에는 결실이 풍성해도 나무가 가진 양분이 많은 열매로 나뉘면서 알맹이 없는 종자가 늘어나는 '풍년의 역설'이다.
22일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에 따르면 한라산연구부는 2022년부터 올해까지 5년간 한라산 구상나무의 개화·결실을 조사하고, 국립백두대간수목원과 함께 종자 충실률을 엑스레이로 분석했다.
이번 조사는 성판악과 윗세오름, 영실, 방애오름 등 한라산 전역 10개 조사구에 자생하는 성숙목 100그루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연구진은 나무의 생육 형질과 연도별 암꽃 생산량, 종자 내부 건전성을 함께 살폈다.
구상나무는 3년 주기로 결실량이 오르내리는 해거리 현상을 보였다. 2022년과 2025년에는 열매를 많이 맺은 반면 2023년과 2024년, 올해에는 결실량이 전년의 10% 수준으로 줄었다.
주목할 대목은 열매의 양과 씨앗의 질이 반대로 움직였다는 점이다. 연구진이 구과 생산량과 종자 충실률을 함께 분석한 결과, 열매가 많이 열린 해에 씨앗의 질은 떨어졌다.
구과가 풍성했던 2025년에는 종자 충실률이 30~40%대로 낮아졌다. 겉으로는 열매가 많아 보이지만, 양분이 분산되면서 종자 내부에 배가 차지 않는 공립, 즉 빈 종자 비율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윗세오름에서는 이런 차이가 뚜렷했다. 세계유산본부에 따르면 구과가 적게 열린 2024년에는 종자 충실률이 58.76%였지만, 대량 결실한 2025년에는 29.97%로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전문적으로는 '자원 희석 효과'로 설명된다. 나무 한 그루가 한 번에 너무 많은 열매를 맺으면 각 종자에 공급되는 양분이 줄고, 그 결과 발아 가능한 충실한 씨앗의 비율이 낮아지는 현상이다.
종자 건전성은 해발고도와 입지에 따라서도 차이를 보였다. 해발 1600m대인 성판악과 왕관릉, 방애오름 일대는 대풍해에도 나무 한 그루당 300개 안팎의 암꽃을 생산하면서 종자 충실률을 50~60% 이상 유지했다. 이들 지역은 한라산 구상나무 집단의 핵심 종자 공급원으로 확인됐다.
반면 저고도의 영실·큰두레왓과 기후 스트레스가 큰 성판악 최상부 1800m 지대는 대풍해에도 개화량이 40~60개에 그쳤다. 종자 충실률도 20~30%대에 머물렀다. 세계유산본부는 이들 지역을 스스로 숲을 되살리는 천연갱신 능력이 약해진 쇠퇴 지역으로 진단했다.
이번 연구는 구상나무 보전 전략에도 직접 활용된다. 세계유산본부는 종자 채취 방식을 이원화할 계획이다. 대풍해에는 저고도 우세목에서 유전자원을 많이 수집하고, 흉해와 평년에는 고고도 건전목에서 알맹이가 찬 고품질 종자를 집중 확보하는 방식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등 연구기관과의 협력도 정례화한다. 세계유산본부는 종자 충실률과 실제 발아율, 어린나무 정착률을 연계해 '한라산 구상나무 종자 품질 표준 지표'를 정립할 예정이다.
구상나무는 한라산 아고산대 생태계를 대표하는 한국 고유종이다. 기후변화와 고사목 증가, 어린나무 갱신 부진이 겹치면서 장기 보전 전략 마련이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이번 조사는 열매가 많이 달렸는지뿐 아니라 씨앗이 실제로 다음 세대를 만들 수 있는지까지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김형은 제주도 세계유산본부장은 "이번 연구는 열매 수가 아닌 종자 품질을 과학적으로 확인한 첫 사례"라며 "발아율과 어린나무 정착률까지 연계해 한라산 구상나무 보전 지표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jyb@fnnews.com 정용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