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fn광장

[fn광장] 한국은행 2008년의 교훈

파이낸셜뉴스

유가 140달러·물가상승률 5%
금리 5.25%로 올린뒤 금융위기
다시 금리 2.0%까지 대대적 인하
최근 유가·환율 급등해 물가상승
금리 올리면 성장둔화·금융불안
예상밖 미래, 유연하게 대처해야

김영익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
김영익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

중앙은행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미래를 내다보고 통화정책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제는 수많은 변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시스템이고, 결정적인 사건은 언제나 예상 밖의 곳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통화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를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이다.

2008년 여름의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한국은행의 최대 고민은 인플레이션이었다. 국제유가는 배럴당 140달러에 육박했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를 넘어섰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은 2008년 8월 기준금리를 5.0%에서 5.25%로 인상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뒤 미국의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세계 경제는 금융위기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던 세계 경제는 순식간에 디플레이션과 금융위기 국면으로 진입했다. 한국은행은 2008년 10월에 기준금리를 5.25%에서 4.25%로 내리는 등 '빅컷'을 단행했다. 그 후 2009년 2월에는 기준금리가 2.0%까지 인하되었다. 당시 누구도 그런 급격한 정책 전환을 예상하지 못했다.

최근 한국은행의 움직임을 보면서 문득 2008년이 떠오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5월 경제전망에서 올해 성장률과 물가상승률 전망을 동시에 상향 조정했다. 중동 정세불안으로 국제유가가 상승했고, 원·달러 환율은 1500원을 넘어섰다. 원화 약세는 수입물가를 자극하고, 이는 다시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은행 입장에서는 물가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성장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그림이 나타날 수 있다. 반도체 수출 증가에 힘입어 상반기 성장률은 예상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지만 하반기로 갈수록 성장세는 빠르게 둔화할 확률이 높다. 수출 증가가 경제 전체로 확산되지 못하는 가운데 내수는 여전히 부진하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의 물가 상승이 수요 과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물가 상승은 국제유가와 환율 상승이라는 공급 충격의 성격이 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으로 대응하면 물가 안정 효과보다 성장둔화와 금융불안이라는 부작용이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

최근 미국경제연구소(NBER)의 한 논문('원자재 충격에 중앙은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도 비슷한 결론을 제시했다. 원자재 수입국에서는 공급 충격에 대해 중앙은행이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가 상승은 물가를 올리는 동시에 성장률을 낮춘다. 이때 금리까지 인상하면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면서 경기침체 위험이 더욱 커질 수 있다.

한국은 대표적인 원자재 수입국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은행은 물가와 성장이라는 전통적 딜레마를 넘어 환율과 금융안정이라는 새로운 과제까지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화는 한국은행이 더욱 신중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미국에서는 케빈 워시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지난 15년간 지속돼 온 유동성 중심 질서가 변화를 맞고 있다. 시장은 여전히 금리 인하를 기대하고 있지만 Fed는 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 국채시장 불안을 이유로 쉽게 완화정책으로 돌아서지 못하고 있다.

만약 미국의 장기금리가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면 한국 역시 독자적인 통화정책 운용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금리를 낮추면 자본유출과 환율 상승 압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금리를 인상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한국 경제는 이미 높은 가계부채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문제를 안고 있다. 금리 인상은 단순한 경기둔화를 넘어 금융안정 문제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2008년의 경험이 보여주듯 미래는 언제나 의외의 곳에서 온다. 지금 세계 경제는 인공지능(AI) 혁명, 지정학적 갈등, 공급망 재편, 원자재 충격, 고부채 구조가 동시에 진행되는 복합 전환기에 들어서 있다. 이런 시대에 중앙은행은 단순히 물가만 관리하는 기관이 아니라 환율과 금융안정, 자산시장과 유동성까지 함께 고려하는 종합 안정화 기관으로 변화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은행이 선택해야 할 길도 분명하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중앙은행은 없다. 그러나 변화하는 환경에 가장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시장의 신뢰를 유지하는 중앙은행은 있을 수 있다. 중앙은행의 진정한 경쟁력은 미래를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예상 밖의 미래에 가장 잘 대응하는 능력에 있을 것이다.

김영익 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