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한여름 대구에서 만난 고요… 숲길 걸으며 사색에 잠기다 [Weekend 레저]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대구 사유원·간송미술관을 가다

천천히 걷고, 잠시 멈춰 서고…
시원한 바람 느끼며 사유원에서 반나절
간송이 들려주는 문화유산 이야기는
작품마다 눈과 마음 시원해지는 호사
간송미술관에선 추사의 전시가 한창
왕사남 영화 속 주인공 엄흥도의 흔적
솟을대문 지나 단종 지킨 사육신 위패
500년 지나도 묵직한 울림으로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명정'은 사유원 내 최고의 포토스팟이다. 대구문화예술진흥원 제공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명정'은 사유원 내 최고의 포토스팟이다. 대구문화예술진흥원 제공

【대구=정순민 기자】연일 수은주가 30도 안팎을 오르내리며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고 있다. 이 성하(盛夏)의 계절에 대구라니. 하지만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 대구에는 더위만 있는 게 아니다. 지난 2023년 7월 대구에 편입된 군위에 가면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사유원'이 있고, 2024년 개관한 '대구간송미술관'에 가면 눈과 마음이 시원해지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게다가 이곳에는 천만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주인공 엄흥도의 실묘(實墓)와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육신사(六臣祠)가 있어 역사 여행지로도 손색 없다.

사유원 맨꼭대기에 위치한 카페 '가가빈빈' 앞 풍경
사유원 맨꼭대기에 위치한 카페 '가가빈빈' 앞 풍경
'소요헌'은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로 시자의 작품이다.
'소요헌'은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로 시자의 작품이다.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정원, 사유원

대구 군위군 팔공산 자락에 자리한 사유원은 일반적인 수목원이나 정원과는 분위기부터 다르다. 입구를 지나 숲길에 들어서는 순간 자동차 소음은 자취를 감추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새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사유원은 자연과 건축,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복합문화정원이다.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는 공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무와 돌, 물과 건축물이 서로를 드러내기보다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30여년에 걸쳐 조성된 약 51만6000㎡ 규모의 정원에는 9개의 주제 정원과 30여점의 건축 작품이 흩어져 있다.

사유원이 다른 정원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여백'이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는 관광지가 아니라,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도록 하루 입장객을 제한한다. 숲길에서 다른 방문객을 자주 마주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천천히 걷고, 잠시 멈춰 서고, 벤치에 앉아 바람을 느끼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정원의 상징은 수령 200~600년에 이르는 모과나무 108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풍설기천년'이다. 오랜 세월 바람과 눈비를 견디며 살아온 나무들은 굽은 가지와 깊게 패인 나이테마저 하나의 조형미를 만들어낸다. 화려한 꽃이나 짙은 색채 대신 세월이 만든 흔적이 아름다움이 되는 공간이다. 가을이면 노랗게 익은 모과가 숲을 물들이지만, 초여름의 짙은 녹음 역시 사유원만의 매력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유원을 특별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건축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소요헌'과 전망대 '소대'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주변 숲과 어색하게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승효상이 설계한 '현암', '사담', '명정' 역시 자연과 건축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사유원을 제대로 둘러보려면 반나절은 잡는 것이 좋다. 숲길을 천천히 걷고, 전망대에 올라 팔공산 능선을 바라보고, 곳곳에 놓인 의자에 잠시 앉아 쉬다 보면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대구간송미술관 상설전시관
대구간송미술관 상설전시관
대구간송미술관 전시장에 내걸린 추사 김정희 초상화
대구간송미술관 전시장에 내걸린 추사 김정희 초상화

■K-헤리티지의 보고, 대구 간송미술관

사유원에서 자연 속 사색을 만났다면, 이번에는 우리 문화유산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차례다. 2024년 문을 연 대구간송미술관은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1906~1962)의 뜻을 잇는 공간으로, 대구를 대표하는 새로운 문화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술관은 건물부터 눈길을 끈다. 대구대공원의 완만한 경사를 그대로 살려 계단식으로 배치한 외관은 산세를 거스르지 않는다. 화려한 장식 대신 단정한 선을 살린 건축은 문화재를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간송미술관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은 간송 컬렉션을 상설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간송이 평생을 바쳐 지켜낸 국보와 보물급 문화유산은 우리 문화사의 정수를 보여준다. 훈민정음 해례본 등 대표 문화재는 특별전 등을 통해 공개되지만, 간송 컬렉션을 중심으로 한 수준 높은 전시는 계절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는다.

현재 미술관에선 기획전 '추사의 그림수업'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들이 남긴 서화 작품을 통해 19세기 조선 문인화의 흐름을 조명한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미술계의 관심도 높다.

전시장 안은 차분한 긴장감이 감돈다.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늦추고 한 점 한 점을 오래 바라본다. 특히 추사가 일흔을 넘긴 나이에 완성한 걸작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앞에선 자연스레 발길이 멈춘다. 먹빛으로만 표현한 난초는 화려한 기교 대신 절제된 필치와 여백으로 깊은 울림을 전한다.

전시에는 추사의 작품뿐 아니라 제자들의 그림과 글씨도 함께 소개된다. 스승에게 이어받은 화풍과 각자의 개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조선 후기 문인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는지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이랑 학예사는 "추사의 작품은 전국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어 한 공간에서 함께 감상하기 어려웠다"며 "이번 전시는 추사의 중년기 대표작과 노년기 걸작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고 말했다.

대구 군위군에 있는 엄흥도 실묘
대구 군위군에 있는 엄흥도 실묘
대구 달성군에 있는 육신사
대구 달성군에 있는 육신사

■'왕사남'을 찾아서, 엄흥도 묘와 육신사

사유원과 간송미술관을 거쳐 이번엔 영화 '왕사남' 속으로 들어가보자. 대구 군위와 달성에는 소년왕 단종을 끝까지 지키려 했던 영화 속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다.

먼저 찾은 곳은 대구 군위군에 있는 엄흥도 묘다. 팔공산 자락을 따라 난 길을 오르면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아담한 묘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충의공 엄흥도의 실묘다.

엄흥도는 단종의 마지막을 지킨 인물이다. 1457년 영월에서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세조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모두가 두려움에 주검을 외면했지만, 영월 호장 엄흥도는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왕사남'은 바로 이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국법을 어긴 대가로 그는 가족과 함께 영월을 떠나 숨어 살아야 했다. 이후 그의 삶은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혔고, 묘소를 둘러싼 논란도 이어졌다. 영월과 군위 등 여러 지역에 묘가 전해지지만, 군위의 영월 엄씨 문중은 이곳이 엄흥도의 실제 묘라고 주장한다.

묘역에는 봉분 다섯 기가 나란히 자리한다. 신분을 감춰야 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 진짜 묘를 알 수 없도록 가묘를 함께 조성했다. 특히 상석에는 묘의 주인을 알리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아 아련함을 더한다.

묘골마을에 있는 카페 '묘운'
묘골마을에 있는 카페 '묘운'

군위를 뒤로 하고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대구 달성군 묘골마을이다. 묘골은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들이 500년 넘게 살아온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사육신 사건 이후 세조는 삼족을 멸하라는 명을 내렸고, 대부분의 가문은 후손이 끊겼다. 그러나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가 낳은 아들은 한 여종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묘골은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는 충절의 마을이 됐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는 육신사가 자리한다. 이곳은 원래 박팽년을 모신 사당이었지만, 후일 영남 유림들이 뜻을 모아 나머지 다섯 사육신의 위패도 함께 봉안했다. 솟을대문을 지나 사당 안으로 들어서면 왕을 향한 절의를 끝까지 지킨 여섯 충신의 위패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 세조 앞에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던 이들의 이름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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