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800조 반도체, 인재는 도시를 선택한다
온 나라가 800조원이라는 투자 규모에 주목하고 있다. 6월 29일 청와대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발표한 서남권 반도체 투자다. 그러나 투자를 받는 지역의 입장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어떤 기능이 내려오느냐다. 사람 없이 돌아가는 자동화 공장과 데이터센터만으로는 지역경제에 오래가는 효과를 내기 어렵다. 결국 사람이 와야 한다. 그날 두 회사 경영진이 정부에 요청한 것도 빠른 행정절차와 함께, 직원과 가족이 살 만한 정주환경이었다. 사람에 대한 고민은 기업도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기업이 투자하는 곳으로 인재가 따라갔다. 산업단지가 들어서면 일자리가 생기고, 사람이 모이고, 도시가 자랐다. 이제는 순서가 뒤집혔다. 인재가 몰리는 곳에 기업이 투자한다. 십여 년간 지방 산업단지에는 생산기능만 남고, 연구개발 조직과 엔지니어, 근로자 가족의 삶터는 수도권으로 옮겨 갔다. 생산기반과 혁신·정주기반이 서로 떨어져 나가는 '탈동조화'다. 국토연구원이 고용보험 자료를 분석한 결과, 구미는 생산직 한 명당 엔지니어가 0.2명에 못 미치는 반면 판교는 3명이 넘는다. 공장은 지방에 있는데 인재는 수도권에 있는 것이다.
반도체는 이 구조를 되돌릴 기회다. 첨단공장은 이제 단순한 제조시설이 아니라 연구, 시험생산, 양산이 한 공간에 맞물리는 거대한 실증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팹을 제대로 조성하면 그간 수도권을 떠나지 않던 연구개발 기능과 고급 기술인력이 함께 내려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저절로 되는 일은 아니다. 젊은 엔지니어가 가족과 정착할 매력적인 도시환경, 그리고 대학·연구소와 교류하며 성장할 혁신생태계가 팹과 함께 조성될 때 가능한 일이다.
대만 신주과학단지가 좋은 참고다. 대만 정부는 해외로 떠난 인재를 불러들이기 위해 1980년 이 단지를 조성하면서, 토지를 분양하는 대신 국가 소유로 두고 기업에 장기임대했다. 명문 공과대학 옆에 터를 잡았고, 산업시설 못지않게 주택과 학교, 병원, 공원에 자리를 내주었다. 오늘날 이곳에는 600여 개 기업과 16만 명이 넘는 인력이 모여 있다. TSMC도 그 토양에서 자란 기업이다. 대만은 팹을 지은 것이 아니라, 엔지니어가 살고 싶은 도시를 지은 것이다.
우리도 답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낡은 산업단지에 정주환경을 덧대는 실험도, 도심 한복판에 산업단지를 끼워 넣는 실험도 해 봤다. 어느 쪽도 여의치 않았다. 정부가 보고회에서 '기업형 첨단도시' 조성을 약속한 것이 반가운 이유다. 관건은 공급의 철학을 바꾸는 데 있다. 공공은 땅을 팔고 떠나는 공급자가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채 도시를 함께 키우는 동반자가 되고, 수요자인 기업에는 인프라와 정주환경을 직접 설계할 권한을 주어야 한다. 산업 따로, 주거 따로, 연구 따로 짓던 칸막이를 걷어내, 산단과 원도심을 하나의 도시권으로 엮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원하는 속도가 나오고, 설령 기업이 떠나더라도 도시는 지역에 남는다.
800조원이라는 숫자는 출발점일 뿐이다. 기업과 정부가 방향에 합의한 지금, 모처럼 지방을 향한 거대한 흐름이 지역의 미래로 이어질지는 결국 우리가 공단을 짓는지, 인재와 기업이 함께 자라는 도시를 짓는지에 달려 있다.
조성철 국토연구원 산업입지연구센터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