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열풍의 역설…월가, 반도체 랠리 '과속' 우려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이 인공지능(AI) 열풍을 타고 급등한 아시아 반도체주에 대해 잇달아 경고음을 내고 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TSMC가 AI 메모리 슈퍼사이클을 주도하며 시가총액 1조달러 기업으로 올라섰지만 주가 상승 속도가 기업가치와 실적 개선을 앞질렀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부 운용사는 차익실현에 나섰고, AI 투자 쏠림이 신흥국 증시 전체를 왜곡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13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피델리티인터내셔널과 블랙록 등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은 AI 반도체 랠리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 빅테크의 AI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가 이어지고 있지만, 주가에는 이미 상당 부분의 기대가 선반영됐다는 판단이다.
캐롤라인 쇼 피델리티인터내셔널 멀티에셋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지수 내 특정 종목 비중이 과도하게 커지고 한국 반도체주에 대한 레버리지 투자까지 확대되는 것은 시장 과열을 판단하는 대표적인 신호"라며 "이런 상황에서는 '지나친 상승이 아닌가'를 점검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개별 종목에 대한 언급은 피하면서도 성장주 비중을 줄이고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신흥국 기업으로 투자 대상을 옮기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도 차익실현에 나섰다.
웨이 리 블랙록 글로벌 최고투자전략가는 "현재 시점에서는 일부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다"며 "최근 실적 전망 상향이 대부분 주가에 이미 반영됐고 변동성도 커진 만큼 당분간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우려하는 것은 단순한 밸류에이션 부담만이 아니다. TSMC와 SK하이닉스, 삼성전자 3개 기업의 MSCI 신흥국지수 비중은 약 29%까지 확대됐다. 인도 전체 종목 비중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며, SK하이닉스 한 종목의 비중만으로 브라질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합친 것보다 크다.
시장에서는 AI 투자 열풍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반도체 기업들의 독주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여전하다.
UBS의 수닐 티루말라이 신흥시장 전략책임자는 "이들 기업은 사실상 과점 체제를 구축했다"며 "기술 산업은 규모가 커질수록 더욱 강해지는 특성이 있다. 독점적 지위를 가진 기업은 결국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며 투자자에게도 훌륭한 종목이 된다"고 평가했다.
다만 경쟁 심화 가능성도 제기된다. 애버딘의 키어런 푼 아시아 주식 투자총괄은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 회복을 변수로 꼽았고, 제프리스의 크리스토퍼 우드 글로벌 전략가는 중국 창신메모리(CXMT)와 양쯔메모리(YMTC)의 기업공개(IPO)가 AI 투자 호황을 계기로 생산능력 확대에 나설 가능성을 경고했다.
제임스 존스톤 레드휠 공동 신흥시장운용 책임자는 "시장 집중도가 이처럼 높아질 때는 사이클의 정점에 가까워졌다는 신호일 수 있다"며 "결국 사이클은 수요가 꺾이거나 공급이 급증하는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로 끝난다"고 말했다.
pride@fnnews.com 이병철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