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광장] 공급망 재편 시대, 한국의 생존 전략
中 의존도 높은 반도체·배터리 소재
美 규제대응 위해 공급망 재편하고
IRA 등 활용 美 중심 공급망 편입
인도·베트남 등에 생산거점 분산
세계가 우리와 협력하지 않고서는
공급망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어야
지난 수십년간 세계경제를 지배한 '효율' 중심 글로벌 분업은 금융위기와 팬데믹, 미중 전략경쟁을 거치며 공급망 안정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제 세계경제의 질문은 "누가 더 싸게 만드는가"가 아니라 "누가 끊기지 않고 공급할 수 있는가"이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 논리가 국가안보 논리에 종속되는 신중상주의(Neo-mercantilism)의 부활을 보여준다.
기존 패권국인 미국은 반도체법(CHIPS Act·칩스법)·인플레이션감축법(IRA)·인프라법 등 '빅3' 법안을 앞세워 국가 생존 논리 우선의 강력한 산업정책을 펼치고 있다. 트럼프 2.0 이후 미국은 더욱 공세적으로 변했으며, 중국에 대한 항구적·정상적 무역관계(PNTR) 폐지 시도와 자본통제 강화는 단순 무역분쟁이 아닌 패권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바이든 정부에서 핵심 기술만 선별 보호하던 'Small Yard, High Fence'는 이른바 'Wide Yard, Higher Fence'로 평가될 정도로 강화되고 있다. 관세는 표면적 수단일 뿐이며, 본질은 중국의 기술굴기를 억제하고 자국 산업 재산업화를 위한 종합산업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은 신중상주의가 강조하는 '상대적 이익(relative gains)' 논리를 잘 보여준다. 즉 절대적 부의 증대보다 경쟁국과의 격차를 확대하는 데 집중하며, 경쟁국에 더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절대적 측면에서 손해보는 정책도 구사하고 있다.
미국에 도전하는 입장인 중국은 '중국제조 2025'를 통해 핵심 부품·소재 국산화율 70% 달성을 목표로 추진해왔다. 반도체 장비, 항공 소재 등 일부 첨단분야에서는 목표에 미달했지만, 신에너지차 부품과 희토류 가공(90%)에서는 사실상 세계를 장악했다. 중국의 전략은 두 축으로 나뉘어 추진 중이다. 첫째는 레거시 반도체를 먼저 장악한 후 첨단공정 국산화율을 높이는 이른바 '저점 확보 후 고점 탈환'으로 전형적인 '파괴적 혁신' 전략이다. 둘째는 인공지능(AI)·수소·탄소중립 등 차세대 분야에 국가자본을 집중 투입하고 '중국표준 2035'를 통해 독자 기술블록을 형성하는 '신질 생산력' 전략이다. 현재 중국의 가장 강력한 전략자산은 핵심 공급망 지배력이다. 희토류는 가공·정련 단계에서 세계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며, F-35 전투기부터 스마트폰·전기차(EV)까지 이 공급망을 거쳐야 한다. 배터리 소재는 양극재·음극재·전해질 생산의 70~80%를 담당하고, 음극재용 흑연 가공의 95%가 중국에서 이뤄진다. 의약 원료(API)는 항생제 원료의 80% 이상, 미국 제네릭 의약품의 상당부분이 중국산 원료에 기반해 군사충돌 없이도 상대국 의료체계에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전략자산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중국이 언제든 지정학적 레버리지로 활용 가능한 상태다.
한국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크게 의존하는 이중구조 속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은 중국산 소재와 기술 사용을 제한하는 규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중국산 원자재와 핵심 소재 없이는 반도체와 배터리 생산 유지가 어렵다. 이러한 여건에서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반도체 소재나 배터리 원재료처럼 중국 의존도가 높아 단기간에 공급망을 전환하기 어려운 분야에서는, 미국의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고 공급망을 재편하는 전략이다. 둘째, IRA와 칩스법 등의 지원을 활용해 미국 중심 공급망에 적극 편입하는 정책 연계형 전략으로 삼성전자·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셋째, 수익성과 효율성을 기준으로 인도·베트남·미국 등으로 생산거점을 분산하는 기업 주도형 전략이다. 넷째, 미국의 압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분야에서 아무런 전략 없이 중국시장에 안주하다가 중국의 기술자립과 산업 고도화가 진전되면서 장기적으로 시장을 상실하는 경우다.
앞서 살펴본 네 가지 대응은 모두 일정한 비용과 위험을 수반하며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축 사이에 있는 한국의 구조적 딜레마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진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측 모두가 한국을 필요로 하는 위치, 즉 '전략적 불가결성(Strategic Indispensability)'을 확보하는 것이다. 미국은 첨단 원천기술과 달러 중심 금융질서를, 중국은 희토류와 핵심 광물 공급망을 전략적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은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 첨단 배터리, 조선, 원전, AI 반도체 패키징 등에서 이미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세계가 한국과 협력하지 않고는 공급망을 유지하기 어려운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경제안보 시대 대한민국의 핵심 국가전략이다.
박기순 한중경제포럼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