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펫 깔린 길 ⑫
파이낸셜뉴스
2003.01.06 08:56
수정 : 2014.11.07 19:58기사원문
김판수 회장은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선우가 들어가서 꾸벅 인사를 했는데도, 그는 책상 위의 서류에 던진 시선을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그 상태 그대로 입을 연다.
“강과장, 당신 춤출 줄 아나?”
“춤출 줄 아느냐구?”
“갑자기 회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그제야 김판수 회장이 얼굴을 들어 강선우를 본다.
“왜, 내가 어려운 말을 했나? 춤출 줄 아느냐고 물었을 뿐인데… 가령 말이야. 친구들 만나 올나이트 같은 거 할 때, 아니 평소에 디스코텍, 자주 가는 편인가?”
“예, 자주 가는 편입니다.”
강선우가 대답한다.
“그럼, 춤은 잘 추겠구먼.”
“잘 춘다기보다… 남들 흉내는 낼 줄 압니다.”
“노래 실력은 어때?”
강선우 입장에서 보면 말 그대로 점입가경이다.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왜 이런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것도 대답하기 어려운가?”
우물거리는 강선우에게 김판수 회장이 채근한다.
“아닙니다, 다만….”
“그래, 왜 내가 춤 잘 추느냐, 노래 잘 하느냐 묻는게 궁금하지?”
“솔직히 그렇습니다, 회장님.”
“그렇기도 할 거야.”
김판수 회장은 다시 서류를 들추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별반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허드렛소리 비슷하게 입을 연다.
“하지만 강과장 당신의 춤 솜씨와 노래 솜씨가 우리 동남자동차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안이 벙벙하여 말문조차 열지 못하고 있는 강선우에게 김판수 회장이 계속한다.
“우리는 당신을 해결사로 파견하기로 최종 결정했어. 물론 당신을 선택한 것은 내가 아니고 에니카야… 그녀는 당신을 슈퍼맨쯤으로 생각하고 있더구만.”
“슈퍼맨이라구요?”
“그래, 꼭 슈퍼맨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 이 시점에서는 좌초직전에 놓인 우리 동남을 구조할 수 있는 적임자가 바로 강선우 과장, 당신이라는 결론을 내린 거야.”
김판수 회장이 창 밖으로 잠시 시선을 던진다. 덩달아 강선우도 본다. 검은색으로 보이는 숲이 펼쳐지고 있다.
오리과인 듯 싶은 새떼가 숲 위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실루엣으로 점찍고 있다. 김판수 회장이 입을 연다.
“물론, 에니카가 그처럼 강력하게 주장하고 밀었어. 나는 지금 누구보다 에니카의 판단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돼. 아니, 믿을 수밖에 없어… 하필 이번에 작고했지만, 자모이스키와 그 부인 에니카가 나의 유일한 후원자였고 자문관이었으니까.”
“하지만….”
하고 강선우가 말한다.
“제가 어떻게….”
“그래, 그게 궁금할 거야.”
김판수 회장이 마치 진학 지도하는 고3 담임 교사처럼 설득력 있게 얘기를 시작한다.
“우리 동남자동차를 반대하는 크라쿠프자동차 노조 위원장이 여자라는 사실 당신도 알지?”
“예, 압니다.”
“그 여자가 춤도 좋아하고 노래도 좋아한다는 거야.”
“예?”
“게다가 술 마시는 일이 취미라는구만.”
그레이스 최에 대한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보지 못한 강선우는 에니카의 안내를 받으며 크라쿠프에서 가장 번화가로 알려진 플로리아인스카 거리로 들어선다. 카페와 쇼핑가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중에 큰 점포가 보이체프호텔 부속 백화점이다. 주로 남성 의류 전문이다. 수입산 고급의류다.
에니카는 두말도 하지 않고 옷을 고른다. 발렌티노 가라바니 수트다. 색깔도 블랙이다. 강선우가 모델이 되어 옷을 걸치고 나오자 에니카가 말한다.
“미국 영화 ‘위대한 게츠비’ 봤어요?”
“아뇨.”
강선우가 대답한다.
/백시종 작 박수룡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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