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망초 골짜기 ⑮
파이낸셜뉴스
2003.04.21 09:24
수정 : 2014.11.07 17:57기사원문
“그게 어느 정도 근거가 있다면, 조국환 부회장은 세상 누구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우선 강미진 여사에게 지금까지 미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고…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애시당초 당신의 판단에 의해 며느리로 점찍어 뒀으면서, 여권실세 따님이 더 유리해 보이니까, 갑자기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는 식으로 ‘동남자동차 차기 오너 경쟁이 워낙 치열해서… 불가불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라고, 핑계 아닌 핑계를 앞세우는 수작도 그렇습니다. 이 얼마나 교활한 방법입니까?”
“그건, 아녜요.”
“그건요.”
주혜경이 말한다.
“그건… 더 유리한 며느리를 얻기 위해 나를 아웃시키는 게 아녜요.”
강선우가 예리한 칼을 들이대듯,
“그럼, 뭡니까?”
라고 묻는다.
“이유는… 말할 수 없어요.”
“왜 말할 수 없죠?”
강선우도 집요하다.
“그건… 프라이버시니까.”
“프라이버시라면… 주혜경씨와 조국환의 문제라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강선우가 주혜경의 물기 많은 큰 눈을 거울인양 들여다본다. 그녀가 강선우의 눈길을 피하며 말한다.
“저, 대답하지 않겠어요… 대신 조국환이 절대로 비겁하거나 비열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밝혀 두겠어요. 정말이에요. 난 조국환을 알아요. 오랫동안 모셨기 때문에, 그 분의 순수함을 알아요.”
주혜경이 드디어, 입가에 흰 거품을 묻히기 시작한다. 다시 출발점이다. 아니,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종착역이다. 아무리 그럴 듯하게 첫발을 내디뎌도 결국 도착하는 곳은 매양 그 자리다.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녀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요, 동남그룹을 정상적으로 다시 일으켜 세울 사람은 조국환뿐이에요. 만약 이번에 조국환이 물러가고 다른 사람, 예컨대 김판수와 야합한 오종근 같은 자가 그룹 부회장직에 오른다면, 그 길로 동남은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말 거예요. 내 말뜻 알겠어요?”
강선우는 난색을 표명하기보다, 똑같은 내용의 주장을 내내 반복하고 있으므로 다소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늦추기는커녕 되레 더 팽팽히 죄고 있다고 해야 옳다.
“그래서 얘긴데… 김판수 회장은 비행기를 전세 내서라도 지금 빨리 귀국해야 돼요. 그래서 조국환 부회장과 손을 잡아야 해요. 그 길만이… 피차 살 길이에요. 내 말 명심하세요, 강선우씨.”
바로 그때다. 찌링찌링 벨이 울린다. 주혜경 핸드백이다. 그녀가 부랴부랴 핸드백을 연다. 그리고 찍힌 번호를 읽는다.
“어머!”
그녀가 깜짝 놀란 얼굴로 뚜껑을 연다.
“여보세요! 어머, 저예요!”
누가 들을세라 부랴부랴 포장을 들치고 밖으로 나간다.
“지금 어디 계세요!”
그녀가 아무리 소곤소곤 말해도 원래 목소리가 까랑까랑하므로 상세히 다 들을 수가 있다.
“아녜요. 병원에 가신 줄 알고… 전화도 못 드리고…. 그냥 기다리고만 있었어요. 어머나! 지금까지 거기 계셨다구요? 알았어요!”
포장마차 주인 여자도 강선우처럼 예민하게 귀를 쫑긋거리고 있다. 강선우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편 손을 은근슬쩍 흔들어 보인다. 주혜경의 연인이라는 뜻이다.
“저, 지금 가야겠어요!”
그녀가 포장을 들치며 황망히 말한다.
“어디로 가는지, 제가 모셔다 드리죠.”
강선우도 일어선다.
“아녜요, 혼자 갈 거예요.”
“하지만, 제가 모시고 왔으니까….”
“그럴 필요 없다니까요!”
그녀가 핸드백을 들고 벌써 저만큼 또각또각 걷고 있다.
“참, 주혜경씨!”
강선우가 그녀를 소리쳐 부른다.
“왜요?”
주혜경이 고개만 뒤돌아본다.
“내가 보낸 그림 있죠? 알프레드 시슬레 그림, 그거 어디 있죠?”
“아, 그거 내 캐비닛에 보관시켰어요. 아무도 진품인지 모르기 때문에 안전해요. 언제라도 오세요. 돌려드릴 테니까.”
/백시종 작 박수룡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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