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과 신약
파이낸셜뉴스
2003.11.06 10:20
수정 : 2014.11.07 12:37기사원문
흔히 질병과 신약은 바늘과 실에 비유된다. ‘악연’이지만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이르는 말이다.
불과 100여년 전만해도 인간은 평균 45세를 살지 못했다. 암환자들은 원인을 모른채 짧은 생을 접었고, 인류는 피할 수 없는 무수한 질병과의 싸움에서 매번 ‘KO패’를 당했다.
지난 100여년간 인류가 개발한 신약은 무수하다.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1928년)에서부터 ‘꿈의 신약’으로 불리는 백혈병치료제 ‘글리벡’(2001년)에 이르기까지. 자고 나면 출현하는 수많은 난치병과의 싸움에서 신약은 절대적 위세를 누렸다.
인류가 신약개발에 눈을 뜬 것은 무엇보다 영국의 생리학자인 베일리스와 스탈링의 공이 크다.
1902년 십이지장 점막에서 분비되는 이자액이나 쓸개즙의 분비를 촉진시키는 ‘세크레틴’이라는 단백질 호르몬이 이들 학자에 의해 추출되면서 부터다.
이후 23년에 당뇨병을 치료하는 ‘인슐린’이, 35년에는 부신피질계 호르몬인 ‘스테로이드’가 각각 추출됐다. 스테로이드는 1898년에 합성된 아스피린보다 항염증작용이 무려 100배나 우수해 지금도 관절염을 비롯한 각종 염증치료에 널리 쓰인다.
1920년대에 발견된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은 갱년기여성증후군과 골다공증 치료는 물론 피임약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물질이다.
지난 100년은 항생제분야에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페니실린이 세균의 세포벽을 약하게 해 병균을 죽게하는 살균제였다면 1950년에 나온 정균제 ‘테트라마이신’(테트라사이클린)은 균의 합성 자체를 억제하는 광범위 항생제로 맹위를 떨쳤다.
이 약물은 지금도 세균성이질에서 부터·발진티푸스·폐렴·기관지염·임질·중이염·결막염·매독 등 거의 모든 감염성질환에 ‘약방의 감초’처럼 애용된다.
앞서 43년에는 셀만 왁스만이 토양에서 분리된 세균으로부터 ‘스트렙토마이신’을 찾아냄으로써 결핵이라는 질병에 종지부를 찍었다.
1970년대 이후에는 각종 위장질환약들이 히트를 쳤다.
1970년대 개발된 최초의 위산분비억제제 ‘타가메트’(시메티딘)는 제산제로 위산을 중화시켰던 이전의 치료법 대신 위산분비 자체를 억제함으로써 인류의 위궤양 치료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 약물은 1985년판 ‘기네스북’에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약으로 기록됐으며, 개발자인 영국의 제임스 블랙은 88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80년대 ‘잔탁’, 90년대 ‘로젝’ 등 더 우수한 위산분비억제제가 잇따라 나오면서 오랫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위장질환의 기세는 무너져 내렸다.
20세기 후반에는 바이러스를 위협하는 신약도 등장했다.
96년에 개발된 에이즈치료제 ‘크릭시반’(인디나이버)이 대표적이다.
에이즈바이러스(HIV) 복제를 억제하고 면역기능을 향상시키는 이 신약은 이때까지 불치병으로 여겨졌던 에이즈를 난치병으로 격하시켰다. 세계적인 농구스타 매직 존슨이 생존해 있는 것도 이 약물의 덕분이다. 국내에서도 지난 97년 5월부터 시판되고 있다.
1999년 발매된 ‘제픽스’(라미부딘)는 원래 에이즈치료제로 연구됐으나 중간에 B형 간염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는 효능이 입증되어 중간에 용도가 바뀌었다. 이 신약은 면역력을 높이는 인터페론과 달리 바이러스에 직접 작용해 증식을 억제시킨다.
그동안 치료가 불가능했던 독감도 99년에 나온 ‘리렌자’(자나미빌)라는 약물이 개발됨으로써 사후 치료가 가능해졌다. 리렌자 역시 에이즈를 연구하다 우연히 개발된 약물이다.
신약은 난치병뿐 아니라 인간의 삶의 질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울증치료제 ‘푸로작’(88년), 대머리 치료제 ‘프로페시아’(97년),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98년) 등은 생명연장보다 삶의 질 개선에 초점이 맞춰진 약물이다.
이제 신약은 좀더 강한 경쟁상대를 원하고 있다.
이른바 불치병으로 불리는 ‘암’의 정복이다.
인간의 유전자지도가 해독되고 유전자가 만들어 내는 단백질의 기능이 속속 밝혀지면서 과학자들은 특정물질만을 타깃으로 하는 일명 ‘맞춤신약’을 정교하게 설계해 내고 있다. 유전공학인 단백질 3차원구조규명 기술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최근 수년동안 잇따라 개발된 에이즈치료제 ‘프로테이즈 억제제’나 백혈병치료제 ‘글리벡’, 비소세포폐암치료제 ‘이레사’, 유방암치료제 ‘허셉틴’ 등이 이 기술로 개발됐다.
머크사가 개발한 프로테이즈억제제는 HIV의 생존에 필수적인 단백질인 ‘프로테이즈’의 작용을 억제, HIV가 숙주에 침투하는 길을 차단시킨다.
글리벡도 마찬가지다. 만성골수성 백혈병 환자는 ‘C-ABL’이란 비정상적인 단백질을 갖고 있다. 세포분화 조절에 관여하는 이 단백질은 백혈병환자의 경우 정상인과 달리 끊임없이 활성화돼 암세포를 무한정 증식시킨다. 글리벡은 바로 C-ABL의 활성을 억제하는 약물이다.
그런가하면 이레사는 정상 세포까지 파괴하는 기존 항암제와 달리 암세포만을 골라 공격한다. 이 약물이 ‘초정밀 유도탄’에 비유되는 이유다.
기존약의 부작용만 제거한 슈퍼신약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슈퍼아스피린’으로 불리는 관절염치료제 ‘셀레브렉스’와 ‘바이옥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만병통치약이었던 아스피린이 해결하지 못했던 ‘위장관 출혈’이라는 ‘옥의 티’를 이들 약물이 말끔히 씻어냈다.
그렇다면 질병과 신약과의 싸움에서 승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일 따름이다.
20세기의 흑사병 ‘에이즈’가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는 것처럼 이 보다 더 무서운 바이러스가 언제 출현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질병이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라면 신약은 이를 사전에 감지하거나 추적해 격추시키는 ‘페트리어트 미사일’인 셈이다.
/ ekg21@fnnews.com 임호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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