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오브 라만차
파이낸셜뉴스
2007.08.09 16:25
수정 : 2014.11.05 05:51기사원문
‘이놈의 회사 확 때려쳐?’
무능하면서 목소리만 큰 상사, 아부만 잘하는 동료를 볼 때마다 자괴감이 몰려온다. 원대한 희망에 부풀었던 옛날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이라도 당당하게 사표쓰고 나가 보란 듯이 하고픈 일을 해 성공하고 싶다.
차라리 직장을 박차고 나간 동료를 보며 자위하는 게 맘 편하다. 대출 받아 장사를 시작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아 후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은근히 안도한다. “그래, 그냥 남아있길 잘했어”
한번이라도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지난 3일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를 추천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뜨끔할 것이다. 주인공 알론조가 현실에 안주하는 우리를 마음껏 비웃기 때문이다.
■미치광이 노인의 말에 귀 기울이다
관객들 눈에 알론조는 미치광이 노인이다. 비루먹은 말 로시난테와 어리버리한 몸종 산초를 끌고 다니며 세계 최고의 기사인 양 거들먹거리는 꼴이 우습다. 풍차를 보고 괴물이라며 돌진했다가 만신창이가 되고 술집 창녀를 ‘성녀’ 둘시네아라고 부르며 무릎을 꿇는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타락한 세상을 구하겠다는 오기가 보기 딱하다.
하지만 그 딱한 알론조가 하는 말 중엔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진실의 적은 현실이지.”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라오.”
“나는 너무나 많은 고통과 더러움을 알고 진절머리 나는 아픔을 알기에 세상을 밝게 바라보려는 사람이외다.”
딜레마다. 알론조를 조롱하던 관객들은 그에게서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거울을 보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깨닫는 순간 알론조는 쓰러진다. 꿈을 거세당한 순간 생의 끈을 놓는다. 팍팍한 현실일수록 내일은 더 나을 것이란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암시하는 대목이다.
■세르반테스의 철학이 고루 녹은 명작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1605년 발표된 세르반테스의 소설 ‘재기발랄한 향사(鄕士) 돈키호테 라만차(일명 돈키호테)’를 원작으로 했다. 세르반테스는 당시 에스파냐에서 유행하던 기사도 소설을 풍자하고자 쉰 여덟의 나이에 펜을 들었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써내려갔지만 소설은 점차 길어져 약 770페이지 두권 분량이 됐다.
세르반테스는 전쟁에 나갔다 포로가 돼 노예 생활을 했다. 공무원 시절 횡령죄로 감옥에도 갔다. 결혼 생활도 실패했다. ‘돈키호테’에는 이처럼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이 녹아 있다.
원작은 방대하지만 뮤지컬은 취할 부분만 취했다. 간결하고 짜임새 있어 이해하기 쉽다.
신성모독죄로 지하감옥에 끌려온 세르반테스가 죄수들과 함께 희곡 ‘돈키호테’를 연기하면서 극은 시작된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해학적이다. 뻔한 사랑 타령을 벗어난 인생 철학이 진하게 배어 있어 품위가 있다.
■‘역시 조승우’ 그리고 만만치 않은 산초
‘맨 오브 라만차’는 조승우가 주연이라는 것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지난 5월말 티켓을 오픈하자마자 조승우가 출연하는 20회 공연의 티켓 1만9000여석 중 1만6000여석이 단 15분만에 바닥났다. 이 같은 ‘예매 전쟁’은 배우에게 큰 부담이다.
하지만 과연 조승우였다. ‘지킬 앤 하이드’나 ‘헤드윅’처럼 진지한 조승우만 봐온 관객이라면 그가 미치광이 노인 역에 제격이란 사실에 또 한번 놀랄 것이다. 작품 감상 중에 그처럼 노래, 연기, 외모를 고루 갖춘 배우가 또 누가 있나 꼽으려니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산초 역 이훈진은 외모부터 산초 그 자체다. 작은 키에 통통한 체구, 개그 프로그램에서 튀어나왔나 싶은 익살스러움. 그에게 정말 딱이다.
커튼콜 후 객석에 불이 들어오자 수십명의 관객들이 무대를 빙 둘러섰다. 오랫동안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팬들. 평소라면 ‘극성’이라며 넘겼을 거다. 하지만 ‘맨 오브 라만차’에겐 아깝지 않은 찬사다.
/wild@fnnews.com 박하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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