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를 내려보는 듯한 ‘왕과 나’
파이낸셜뉴스
2007.08.16 11:20
수정 : 2014.11.05 05:04기사원문
【싱가포르=한민정】무대 위를 신나게 휘젓는 왕과 애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발이 들썩거린다. 너무나 귀에 익숙한 ‘쉘 위 댄스’의 음악에 맞춰 이들이 뱅그르르 무대를 도는 동안 함께 따라 돌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다. 2층의 발코니에서 바라본 이 커플의 모습은 아름답고 황홀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 순간 뿐이다. ‘왕과 나’를 보는 내내 아시아를 내려보는 듯한 이들의 시선을 참을 수 없었다. 음악만 즐기고 아름다운 공연만 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도 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이런 불편한 느낌은 예전 ‘미스 사이공’을 봤을 때와 비슷했다. 다른 ‘왕과 나’를 보았을 때는 이렇게 불편하지 않았는데 외국에서 본다는 느낌 때문인지 의아해졌다.
율 브린너와 데보라 카, 주윤발과 수잔 서랜든, 김석훈과 김선경, 그리고 이번 공연의 폴 나카우치와 브리아나 보르거. 이들은 내게 있어 4번째 왕과나의 커플이다. 두말할 필요없는 율 브린너, 서양인의 관점에서 멋진 주윤발, 가장 젊고 매력적이었던 김석훈에 이어 폴 나카우치는 독선적이고 카리스마가 있는 왕이라기 보다는 장난기 많은 개구장이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폴 나카우치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시암 왕의 ‘소년스러움’을 나타내려고 애썼다고 밝혔다.
앞서 다른 왕과 나의 커플들이 모두 외국인이거나 혹은 모두 한국인이어서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동양의 모습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면 다민족 국가인 싱가포르라는 환경에서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의 모습이 이번 공연에서는 또렷하게 느껴졌다.
왕과 나의 공연과 영화 상영이 태국에서는 금지되어 있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던터라 공연을 보러 가기전, 왜 태국에서 이를 금지했는지 실제 시암 왕의 모습은 어떤지를 알아봤다. 영국 가정교사 애나가 태국에 도착했을 때 시암 왕의 나이는 60대, 애나는 20대 후반이었다. 공연에서는 애나가 왕에게 여러가지를 조언하는 참모와 같은 모습으로 나왔지만 실제로는 태국 왕실에 있던 수많은 가정 교사들중의 하나로 단지 ‘영어’만을 가르치던 교사라고 한다. 따라서 공연에서와 같은 왕과 대등하게 맞서는 모습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 태국측의 주장이다.
또 영국에서 온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애나는 실제로는 인도에서 태어났으며 10대 시절 학교 교육을 위해 영국에 몇년 머무른 것이 그녀의 영국 생활의 전부다. 백인과 아시아인의 혼혈인 엄마와 영국인 사이에 태어나 아시아인의 피가 흐르는 애나는 자신보다 20살이나 많은 남자에게 부모의 강권으로 시집가는 언니를 보고 싱가포르로 도망쳐 영국 군인이 아닌 상점 점원인 남편과 결혼한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등을 오가며 살던 애나는 남편의 죽음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태국 왕실에 영어 교사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를 과장되게 묘사한 책을 쓴 것이 혹시 자신에게 흐르는 아시아인의 피를 부정하기 위한 반발이 아니었나 추측도 해보게 됐다. 실상 애나는 공연 내내 시암 왕국의 미개함을 지적하며 영국의 우수함을 설명하지만 동양인인 나로서는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았다. 애나가 왕에 대해 납작 엎드려서 절하는 것이 노예같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한국 남자들이 절하는 모습은 마치 땅바닥을 기어가는 것 같다는 말을 들은 개인적 기억이 겹치면서 상당히 불쾌감을 느꼈다. 한 나라의 문화를 자기네들 잣대로 이렇다 저렇다 말한다는 것이 정말 미개한 것이 아닌가. 드레스를 차려입고 남자가 선택해줄 때까지 벽에 그려진 꽃처럼 서있는 영국의 무도회장 풍경을 설명하면서 그것은 정말 아름다고 황홀한 광경이라고 말하는 애나가 더욱 의아스러울 뿐이다.
공연이 끝나가면서 문득 만일 이 공연의 배경이 일본이었다고 해도 이 뮤지컬이 이토록 고집스레 잘못된 기록을 바탕으로 공연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 뮤지컬의 배경이 고종황제 시절이고 서양 가정교사가 고종에게 조목조목 조선의 독립을 위한 조언을 해주고 한국의 노예와 같은 엎드려 절하기 풍습을 없앴다는 내용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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