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인간,과거와 현재의 공존..캄보디아를 가다
파이낸셜뉴스
2008.04.03 16:06
수정 : 2014.11.07 09:25기사원문
캄보디아는 서로 다른 몇 개의 영화로 기억되는 나라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롤랑 조페 감독의 ‘킬링 필드’(1984년)를 비롯해 장만옥과 양조위의 숨박힐 듯한 사랑이 영롱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2000년), 안젤리나 졸리가 여전사 라라 크로포트로 등장하는 ‘툼 레이더’(2001년) 등에서 캄보디아를,혹은 캄보디아의 이미지를 만날 수 있다. 의사 출신의 캄보디아 배우 행 응고르에게 아카데미의 영광을 안겼던 ‘킬링 필드’에서는 캄보디아의 가슴아픔 현대사가, ‘화양연화’와 ‘툼 레이더’에서는 영원(永遠)의 이미지로 등장하는 캄보디아의 대표적인 유적지 앙코르와트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킬링 필드’와 ‘툼 레이더’의 나라 캄보디아가 최근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해외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캄보디아를 찾은 해외관광객 200만여명 중 16.37%인 33만여명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이는 경제대국인 일본(8.04%)이나 미국(6.83%), 인근 국가 베트남(6.23%), 중국(5.88%), 대만(5.86%), 태국(5.04%) 보다도 많은 규모여서 놀랍다.
앙코르와트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씨엡립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에도 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캄보디아의 가슴아픈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킬링 필드’를 목격하기 위해선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프놈펜을 찾아야 한다. 또 오는 5월 말 개장을 앞두고 있는 캄보디아 최대의 복합 엔터테인먼트 리조트인 나가월드를 방문하기 위해서도 이제 프놈펜은 꼭 들러야 할 곳이 됐다. 캄보디아 문화관광부 소 마라 차관은 “서울에 가야 한국의 진면목을 볼 수 있듯이 캄보디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수도인 프놈펜을 꼭 둘러봐야 한다”면서 “왕궁과 국회의사당 등이 있는 프놈펜은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엡립에 이은 제2의 관광포인트”라고 강조했다.
■앙코르와트, 영원에 관하여
앙코르 유적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마치 생(生)과 사(死)의 경계에 서있는 듯한 느낌에 빠져든다. 거대한 석상들이 만들어내는 낯선 풍경은 이곳이 이승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오체투지(五體投地) 하듯 올라야만 하는 가파른 돌계단은 천상으로 가는 길처럼 아득하다.
사실 앙코르와트는 거기에 그렇게 오랜 시간 존재해왔지만 세상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60년 프랑스 식물학자 앙리 무오에 의해서다. 멸망 후 수세기 동안 밀림 속에 묻혀 있던 고대 왕국의 거대한 유적지를 처음 발견한 앙리 무오는 자신의 노트에 "솔로몬 신전에 버금가는, 미켈란젤로와 같이 뛰어난 조각가가 세운 앙코르와트. 이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이 세운 것보다 더욱 장엄하다"고 적었다.
통상 앙코르 유적지로 불리는 이곳을 돌아보기 위해선 하루 이틀의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불리는 앙코르와트를 중심으로 반경 30㎞내 수십개의 사원과 1000여개에 이르는 고대 건축물들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부족한 여행객들은 단축 코스로 앙코르와트, 바이욘, 타프롬 등 3대 유적지를 둘러보면 된다. 외벽 길이가 5.5㎞에 달하는 앙코르와트는 십자형으로 반복되는 기하학적 구조와 웅장함이, 바이욘은 소위 '크메르의 미소'로 불리는 49개의 거대 석상과 벽면 부조가, 영화 '툼 레이더'의 배경이 됐던 타프롬은 성벽을 집어삼킬 듯한 형상의 거대한 열대우림이 여행객의 눈을 압도한다.
■돈레쌉, 행복에 관하여
앙코르 유적지가 있는 씨엠립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돈레쌉 호수로 가기 위해선 울퉁불퉁한 황톳길을 달려야 한다. 돈레쌉 호수로 가는 길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누런 흙먼지와 "1달러"를 외치는 '원달러 소년'들이다. 조악하게 만든 기념품이나 그림엽서 따위를 내미는 그들의 눈망울과 마주치면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선 지갑을 열게 마련이다. 앙코르와트가 캄보디아의 옛 영화를 웅변한다면 돈레쌉 가는 길은 그들의 궁핍을 고스란히 전시하고 있는 셈이다.
메콩강이 역류해 생겨난 아시아 최대의 호수 돈레쌉에서 눈여겨 볼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바다인지 호수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드넓은 호수의 넓이와 크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곳을 터전 삼아 힘겹게, 그러나 나름대로 행복하게 삶을 꾸려가고 있는 수상마을 사람들이다.
돈레쌉 수상마을에는 없는 것이 없다. 고만고만한 배 위에 집을 짓고 사는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엔 학교와 병원이 있고, 잡화점과 미용실이 있고, 철물점과 주유소가 있다. 흔들리는 물 위에 꾸민 작은 정원과 닭·돼지 등 가축을 키우는 우리, 집집마다 높다랗게 설치된 TV 안테나도 인상적이다. 자동차용 배터리를 충전해 사용한다는 텔레비전은 그들에게 이제 더이상 사치품이 아니다.
돈레쌉 호수는 평소 '나의 삶은 불행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번쯤 권해볼 만한 여행지다. 돈레쌉 호수의 싯누런 물줄기와 구불구불한 황톳길은 여행객을 어쭙잖은 '개똥 철학자'로 만든다.
■투얼슬랭, 증오에 관하여
프놈펜 중심가에 위치한 투얼슬랭 고문 박물관은 관람객의 마음을 찍어 누른다.
원래 고등학교로 사용됐던 이 건물에 공산반군 크레르루주 제21보안대가 자리를 잡은 것은 지난 1975년 4월. 이때부터 폴 포트가 이끄는 크로메루주가 축출된 1979년 1월까지 이곳에 끌려와 생사의 기로에 섰던 사람은 1만6000여명에 이른다.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온 사람은 겨우 7명. 크메르루주는 안경을 쓰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얼굴과 손이 하얗고 부드러운 사람, 외국서적을 갖고 있는 사람, 피아노나 기타를 치는 사람 등을 처형자 명단에 올렸다. 전 정권이나 미국을 도운 '악덕 세균 척결'이 명분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인간에 대한 증오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투얼슬랭 박물관에는 죽은 자들의 해골과 생전의 사진, 끔찍한 고문 기구 외에도 이곳에서 생환한 한 이름없는 화가의 그림이 곳곳에 걸려 있다. 두 눈으로 목격한 당시의 참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의 그림들은 외마디 비명 소리처럼 관람객의 귓전을 때린다.
또 지난 1980년 8900여구에 달하는 시신이 발견된 프놈펜 외곽의 체옹에크는 아예 영화의 제목을 차용해 '킬링 필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는 희생자들의 해골을 쌓아 만든 80m 높이의 위령탑이 있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위령탑을 관리·운영하는 주체가 캄보디아 정부가 아니라 일본 자본인 JS로열사라는 사실이다.
■나가월드, 즐거움에 관하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지우개로 깨끗하게 지울 순 없겠지만 캄보디아 사람들은 사실 '킬링 필드'의 비극을 잊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아시아 최빈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두운 과거가 아니라 밝은 미래이기 때문이다.
현재 캄보디아 경제를 견인하는 쌍두마차는 봉제산업과 관광산업이다. 희생자들의 넋을 기려야 하는 위령탑마저도 관광지로 개발하는 캄보디아 정부는 해외자본 유치에도 아주 적극적이다.
프놈펜에 있는 나가월드 리모델링 사업에 한국 기업을 끌어들인 것도 이런 의도의 일환으로 보인다. 코스닥 등록업체인 ㈜오페스가 사업자로 참여하고 있는 나가월드는 508실 규모의 호텔 외에도 카지노, 스파, KTV(가라오케), 명품숍 등을 갖춘 캄보디아 최대의 복합 엔터테인먼트 리조트로 오는 5월 말 재개관을 앞두고 있다. 나가월드는 프놈펜을 관통하는 메콩강변에 위치한 데다 국회의사당, 왕궁, 투얼슬랭 박물관, 센트럴마켓 등과 가까워 프놈펜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를 전망이다.
㈜오페스 김성주 대표는 "나가월드는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에 집중됐던 캄보디아 관광을 프놈펜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모기업인 포이보스의 도움을 얻어 한국 연예인들의 공연을 추진하는 등 또다른 즐거움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씨엠립·프놈펜(캄보디아)=jsm64@fnnews.com 정순민기자
■사진설명=바이욘 사원이 있는 앙코르톰의 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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