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박승모-인간이 아름다울 때
여기 한 마리의 거미가 있다. 어둠이 걷히고 풀잎에 맺힌 이슬이 아침 햇살에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순간, 거미는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거미줄을 치려고 하는 것이다. 거미의 꽁무니에서는 투명하고 가는 줄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온다. 거미에게 있어서 그것은 생리이자 삶의 본능이다.
거미가 아름다운 까닭은 삶의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거미줄을 치지 않는 거미를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런 거미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나이팅게일은 노래를 잘 부르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것은 그 새의 본능이다. 마찬가지로 예쁘게 화장을 하는 여인은 아름답다. 화장은 여성의 생리이자 본능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가꿀 때 가장 여성답고, 남성은 싸움터에 나가 용감하게 싸울 때 가장 남성다운 법이다. 남들이 다 직장에 나가 열심히 일할 때, 집안에 들어앉아 열심히 화장을 하는 남성을 연상해 보라. 저절로 웃음이 나올 것이다. 오늘날 많은 여성들은 화장도 열심히 하고 밖에 나가 전사처럼 씩씩하게 잘도 싸운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모든 사물은 덩어리(mass)와 양감(volume)을 지니고 있다. 이것들은 조각용어다. 일상적인 말로 하자면 일종의 부피와 체형 같은 것이다. 장작개비처럼 비쩍 마른 사람, 일찍이 자코메티는 인간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것이 그가 본 인간상이었다. 반면에 콜롬비아 출신의 작가 페르난도 보테로는 뚱뚱하고 풍만한 인간의 전형을 창조했다. 그것 또한 그가 본 인간상이다.
박승모는 알루미늄 와이어로 실제 크기의 인체 조각을 한다. 옷을 벗은 나체의 남녀를 모델로 삼아 와이어로 감싼 조각상을 만드는 것이다. 김유정이니, 김미나니, 정준영과 같은 이름을 붙인 것으로 봐서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실존 인물인 것 같다. 그는 그러한 인물들을 모델로 택해 우선 정교하게 모습을 본뜬다. 실제와 똑같이 닮은 조각상을 완성한 후에 그는 알루미늄 와이어로 그것의 표면을 감싼다. 인체의 표면을 따라 부드럽게 굽이치는 와이어의 잔잔한 물결….
일찍이 신학철은 70년대에 노끈으로 사물을 감싼 적이 있었다. 그는 수저, 장수하늘소, 나뭇가지 등을 흰색 노끈으로 섬세하게 감싼 소규모의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는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중미술 쪽으로 자신의 노선을 바꿨다. 신학철의 이 방법론은 박승모에 의해 더 철저하게, 더 스케일이 크게 전개되기에 이른다. 박승모가 신학철의 이 작품들을 알았든 몰랐든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언어화’다. 거기에는 뼈를 깎는 심화의 과정이 필요하고, 기술적 노하우의 지속적인 축적이 따른다.
박승모는 피아노나 콘트라베이스와 같은 사물에서 시작하여 인체라는, 보다 생동감이 있는 대상으로 옮겨 갔다. 인체의 상을 감싼다! 정수리부터 시작해서 발끝에 이르는 이 감쌈의 도정은 그 자체가 엄청난 인고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이 섬세함의 극치를 보라! 이 완벽의 극치에 도달한 ‘감쌈’의 방법론은 실로 자기극복의 엄청난 노동의 결과가 아닌가. 그것은 실로 구도가 아닌가!
‘헤원’은 이제 막 걸어 나오려고 발걸음을 옮기는 동작을 일종의 멈춤 자세로 완성한 작품이다. 눈을 감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상념에 빠진 남자를 묘사한 것이다. 번들거리는 금속성 와이어의 피부 질감은 마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인조인간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얼굴이나 벌거벗은 몸에서 풍기는 저 인간적인 고뇌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예술작품이 지닌 영원한 수수께끼가 아닌가. 희랍신화에는 자기가 만든 조각상에 반해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이란 조각가의 일화가 나온다. 대부분의 조각가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다. 자기의 재주에 자기가 반해 작품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 과정이 없다면 어떻게 남을 감동시킬 것인가.
박승모는 여성은 여성답게, 남성은 남성답게 표현한다. 그 이유는 남녀의 벗은 몸을 있는 그대로 감싸기 때문이다. 이 ‘있는 그대로(literal)’의 직설법에는 일체의 분장이나 호도가 통하지 않는다. 그 어떤 화장술도 용납되지 않는다. 남성 같은 여성이나 여성 같은 남성은 있을지언정, 사회적 성(gender)의 역전 현상은 나올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인간을 원초적 상태로 ‘되돌리는(back to the root)’ 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하는 것 혹은 여성이 남성의 역할을 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현상이다. 그 역할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른바 부계사회에서 모계사회로의 이동 또는 그 반대의 경우는 그래서 가능하다. 그러나 남성이 수유를 한다든지 여성이 사정을 하는 것과 같은 경우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생물학적 차원의 성의 고유한 기능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박승모가 만들어 낸 인간의 몸은 아름답다.
그의 조각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성을 여성으로, 남성을 남성으로 본성에 충실하게 본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융합(hybrid)이 없다. 남성과 여성의 절충, 혹시 트랜스젠더라면 모를까. 그러나 그는 아직 거기까지는 안 갔다. 트랜스젠더, 신이 만들어 낸 인간의 비극, 너무나 인간적인 그리고 또한 너무나 아름답기도 한.※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