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스프레이,무대와 스크린 밀월관계 ‘전형’

파이낸셜뉴스       2009.12.10 17:17   수정 : 2009.12.10 17:17기사원문

장르를 넘나드는 문화 콘텐츠의 이동을 추적하다 보면 요즘 무대와 스크린의 밀월관계가 새삼 흥미롭게 느껴진다. 특히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무비컬이 등장하고 이를 다시 뮤지컬 영화로 제작하는 순환적 전개는 하나의 소스로 다양한 부가가치를 잉태해낸다는 문화산업계의 원 소스 멀티 유즈(OSMU)를 실감케 한다. 단순히 외형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없던 새로운 재미가 더해지고 볼거리, 즐길거리가 늘어나는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의 진화를 연상케 한다. 뮤지컬과 영화가 사랑에 빠진 진정한 이유다.

뮤지컬 ‘헤어스프레이(Hairspray)’는 그런 변화의 전형적인 사례다. 원래 처음 시작은 뮤지컬이 아닌 영화에서 비롯됐다. 괴짜로 유명한 미국 태생의 영화감독 존 워터스가 1988년 발표했던 동명 타이틀 영화가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이른바 ‘초절정 컬트 영화(transgressive cult movie)’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파격과 일탈, 실험성을 짙게 반영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그나마 ‘헤어스프레이’는 거의 유일하게 PG(부모가 동반한 아이들은 영화를 볼 수 있는 등급)로 판정받았던 ‘건전한’ 작품이다. 어린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개인적인 삶의 터전이었던 1960년대의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통통한 외모의 10대 소녀 트레이시가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극복하고 마침내 TV 쇼 프로그램의 유명인이 된다는 역발상의 스토리를 고안해냈다.

물론 제목으로 쓰인 ‘헤어스프레이’는 밤새도록 땀 흘리며 신나게 머리 흔들고 춤추며 놀아도 아침까지 그 모습 그대로 헤어스타일을 유지시켜주는, 당시 미국 젊은이들에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소품이자 패션의 동반자를 풍자와 해학의 맛으로 포장한 개념이다. 하지만 10대의 헤어스타일에 얽힌 존재가 뮤지컬 제목으로 등장했던 것은 ‘헤어스프레이’가 처음은 아니다. 그보다 앞서 이미 뮤지컬 ‘그리스(Grease)’가 있었기 때문이다. 월드컵 예선전에서 만날 유럽 국가명이 아닌 머릿기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에겐 ‘구리스’라는 발음이 더 익숙한 바로 그 물건이다. 존 트레볼타, 올리비아 뉴튼 존이 주연으로 나왔던 고등학생들의 이야기 ‘그리스’가 1950년대 풍의 미국 젊은이들의 삶을 반영한 경우라면, ‘헤어스프레이’는 그보다 한 세대 뒤인 1960년대 정서를 적극 투영한 경우다. 흑백 TV의 쇼 프로그램이나 그 안에 등장하는 무용수들의 춤 동작을 따라하며 환호하는 청춘군상 등의 풍경은 ‘짝꿍들’에 열광하며 허슬 춤을 추던 우리나라 1980년대 청소년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큰 매출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괴짜 감독의 작품답게 영화는 마니아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기존의 질서를 타파하고 모든 선입견으로부터 일탈을 꿈꾸는 극적 전개가 특히 60년대 정서를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향수와 복고의 재미를 안겨줬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히피 문화, 워터게이트 사건 등으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은 60년대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고, 기존 질서에 대한 반발은 그래서 시대적 가치관을 반영하게 됐다. 영화를 보는 재미 역시 바로 그런 선입견의 타파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특히 화제가 됐던 것은 극중 트레이시의 엄마인 에드나의 캐스팅에 관한 일이었다. 기존 질서와 선입견에 대한 도전의 의미로 영화에서는 여장남자인 디바인이 이 역으로 발탁됐다(드레그 퀸으로 유명한 그의 본명은 해리스 밀스테드로 여장을 한 자신의 페르소나를 디바인이라 불렀다). 투박한 외모에 걸걸한 허스키 목소리가 흔히 상상하는 어머니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외형적 특성과 무관하게 디바인은 자신 안에 숨어 있던 여성성을 적절히 끌어내 완성도 높은 캐릭터 구축을 이뤄냈다. 중요한 것은 얼굴도 목소리도 이미지도 아닌 내면의 진정성이라는 명제를 몸으로 직접 입증시킨 셈이다.

▲ 영화 ‘헤어스프레이’ 포스터

영화가 뮤지컬로 옷을 갈아입은 것은 2002년의 일이다. 뮤지컬 영화 ‘시카고’의 감독이었던 롭 마셜이 연출을 맡아 영상을 무대로 재해석해냈는데, 흔히 무비컬들이 그렇듯 노래와 춤을 적절히 활용하고 유머러스한 상황 전개와 공간 활용의 볼거리를 덧붙여 화려한 코미디 뮤지컬로 환생시켰다. 특히 에드나의 캐스팅은 작품 제작 소문이 알려지면서부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극작가 겸 연기자로 유명한 동성애자 하비 피어스타인이 전격 발탁되며 파격적인 캐스팅의 계보를 이어갔다.

2007년 무비컬은 다시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며 멀티 유즈 과정에 정점을 찍었다. 뮤지컬 영화 버전에서는 에드나 역으로 특수 분장을 한 존 트레볼타가 캐스팅됐다. 앞서 영화와 무대의 배우들이 커밍아웃을 한 동성애자들이었던데 비해 존 트레볼타는 이성애자면서도 에드나 역을 맡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모든 선입견에 대한 도전이라는 원작의 실험정신에는 크게 위배되지 않는 범주에서의 작은 타협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무대와 달리 블록버스터 영화는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해야 하고, 동성애자보다 유명 연기자를 활용하는 마케팅적 고려가 낫다는 정책적 판단의 결과였다. 영화는 1억1887만달러의 매출을 달성하는 대박을 이뤄냈고 결국 ‘그리스’, ‘시카고’와 함께 세계적으로 2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3대 뮤지컬 영화로 손꼽히게 됐다. 훗날 영화 ‘맘마미아’가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 전까지는 이 작품은 가장 큰 돈벌이를 기록한 뮤지컬 영화로 손꼽히기도 했다.

영화가 등장했다고 무대 공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흥행은 무대의 관객을 늘어나게 만들고, 무대의 흥행은 영화의 글로벌한 소비를 진작시키는 경우가 많다. 올해 말 우리 공연가에서도 새로운 캐스팅으로 무장한 우리말 버전이 다시 막을 올린다.

예전의 정준하와 김명국의 바통을 이어 여장남자인 에드나 역으로 개그맨 출신 방송인 문천식이 나온다. 라디오 등을 통해 맛깔스러운 수다를 선보였던 그가 무대에서는 어떤 여성성을 발휘해줄지 관심이 높다. 2009년 말 만나는 ‘헤어스프레이’가 얼마나 많은 우리 사회의 편견과 선입견들을 깨뜨릴 수 있을지 사뭇 기대가 크다.

/순천향대 교수·뮤지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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