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패션위크 대표 디자이너 3인이 말하는 ‘명품’
파이낸셜뉴스
2011.04.07 18:57
수정 : 2014.11.06 22:13기사원문
'명품=수입 고가품'이란 공식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 '한국의 명품'을 지향하는 디자이너들은 이런 편견과 맞서기 위해 열정을 불태운다. 지난달 28일부터 지난 2일까지 열린 서울패션위크는 그런 의욕이 반영된 자리다.
서울패션위크의 프로그램은 크게 3개로 나뉜다. 정상급 디자이너를 위한 '서울컬렉션', 신진을 위한 '제너레이션 넥스트', 중간 단계의 디자이너를 위한 '패션 테이크 오프'가 그것이다. 3개의 컬렉션에서 각각 대표 디자이너를 선정해 만남을 가졌다. 과연 그들은 누구며 어떤 생각으로 옷을 만들까.
■ ‘서울컬렉션’ 출전 송지오 디자이너
“경제신문이니까 제가 망했던 이야기부터 하면 재미있겠군요. 1990년대 후반 유명 기업과 손잡고 브랜드를 론칭했는데 그게 잘못되는 바람에 한동안 정말 힘들었지요.”
꺼낼까 말까 망설였던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어두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싱긋 웃는 여유도 부렸다. 옷을 만든 세월만 20년. 카리스마와 고집으로 똘똘 뭉쳐도 손가락질 받지 않을 위치지만 송지오는 다른 길을 택했다. 그와 함께 일해본 이들이 기분 좋은 뒷맛을 간직하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그를 만나러 가는 길도 좀 특별하다. 대다수 디자이너가 서울 압구정동과 청담동에 둥지를 튼 것과 달리 그는 공장이 많은 성수동에서 일한다. 매일 그는 화려한 패션가 대신 빼곡히 들어선 의류 부자재 점포를 감상하며 출근한다.
송지오는 이름 석자로 존재감을 알리는 몇 안 되는 토종 디자이너다. 시작은 여성복이었지만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남성복으로 전향했다. 그런 그의 삶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동시진행’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그의 사무실 풍경이다. 입구엔 각종 컬렉션에 출품할 옷과 소품이 진열돼 있고 한쪽 구석엔 그가 그리다만 그림이, 또 다른 구석엔 골프채가 세워져 있다. 옷과 그림과 운동. 그가 푹 빠져 있는 대상이다.
동시 진행인 것은 더 있다. 그는 ‘송지오 옴므’와 ‘지오송지오’ ‘지오송지오 온라인’ ‘송지오 골프’까지 4개의 브랜드를 운영한다.
송지오 옴므는 파리컬렉션을 통한 해외 판매 위주의 고급 브랜드, 지오송지오는 대리점을 통해 판매되는 매스티지(대중적인 명품)급 남성복, 지오송지오 온라인은 홈쇼핑과 인터넷으로 판매되는 중저가 브랜드, 송지오 골프는 대리점에서 판매되는 골프 웨어 브랜드다. 이중 송지오 옴므는 미국의 뉴욕, 일본의 도쿄·오사카, 중국 홍콩·상하이·베이징, 러시아, 대만 등지에 나가 있다. 올 하반기부터는 미국 시애틀과 싱가포르,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도 진출한다.
그는 송지오 옴므를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지난해 잘나가던 압구정동 쇼룸까지 접었다. 정상급 연예인은 물론 정재계 유명 인사까지 그의 옷을 구입하기 위해 찾던 곳이지만 컬렉션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내린 결단이다. 국내에선 원로급 디자이너지만 굳이 해외에 나가 ‘신참’을 자처하는 이유도 그때문이다.
“파리 컬렉션에 가면 제 앞으로 루이비통, 뒤로는 랑방 등 굵직한 브랜드가 쇼를 합니다. 그래도 기 죽지 않아요. ‘송지오 옴므만의 색깔이 있다’는 평을 받고 있으니까요.”
송지오는 종종 모순을 즐긴다. 국내에선 20년차 디자이너의 원숙함을 해외에선 신진의 기발함을 뽐낸다. 한쪽에선 수백만원짜리 옷을 제작하지만 다른 한쪽에는 일반 대중도 살 수 있는 10만원대 옷을 만든다. 송지오의 옷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는 동안 대중은 그를 친숙하게 여긴다. 덕분에 지오송지오는 올해 매출 50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최근 개최한 서울패션위크 서울컬렉션에서 그는 36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모델 출신 배우 차승원, 인기 그룹 씨앤블루의 이정신, 모델 겸 배우 이수혁 등이 그의 옷을 입고 무대에 섰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경탄을 자아내는 실루엣과 디자인은 ‘과연 송지오답다’는 평을 언론과 바이어들로부터 이끌어냈다.
“송지오 옴므를 세계적인 명품으로 만드는데에 회사의 역량을 집중할 계획입니다. 명품이란 얼마나 오랫동안 당대의 대중에게 사랑받느냐로 규정할 수 있는데 제 작품이 바로 그런 반열에 오르길 바라고 또 확신합니다.”
■ ‘패션 테이크 오프’ 출전 최지형 디자이너
'쟈니는 재즈를 싫어해요(JOHNNY HATES JAZZ ).'
쇼룸 입구에 걸린 간판이 눈길을 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다.
"재즈를 참 좋아해요. 그걸 표현할 만한 방법을 찾다 '싫어한다'고 표현하기로 했죠."
홑꺼풀의 큰 눈을 깜빡이며 디자이너 최지형(35)이 말했다. 남색 트렌치코트에 검은 바지 정장. 올해 서울패션위크에서 가장 '큰 일 낼 뻔한' 인물치고는 차림새가 얌전하다.
"예상을 뛰어넘는 인원이 쇼를 보고 싶다고 와주었어요. 무대 뒤편에서 '별 일 없을까'하며 조마조마해했죠."
실제로 그랬다. 그의 쇼가 열리기 직전 서울패션위크 관계자들은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해외 바이어와 언론이 만 5년도 안된 신진 브랜드에 이렇게 주목한 적이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자리가 부족하다'는 말이 나왔고 자칫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많았다.
서울패션위크 프로그램 중 하나인 '패션 테이크 오프'에서 최 디자이너는 35벌의 옷을 선보였다. 주제는 뱀파이어, 지난 시즌 이른바 '쿠번 콘셉트'에 맞춰 화려한 색상을 뽐낸 것과는 반대의 분위기다. 그럼에도 시즌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있다.
"보여주고 마는 옷이 아니라 실제로 사서 입고 싶은 옷을 만들어요. 가격대도 그렇게 책정했고요."
그가 만든 옷은 티셔츠는 8만원대, 코트류는 80만원대에 판매된다. 디자이너 브랜드치고는 저렴한 편이다. 아이템 역시 기본에 충실하다. 기본 색상의 트렌치코트, 재킷 등은 만들기 무섭게 팔려나가는 아이템이다.
그의 브랜드 '쟈니헤이츠재즈'는 4년차지만 최 디자이너 경력은 10년을 넘어간다. 학창 시절에는 디자이너 지망생들이 으레 그렇듯 비비안웨스트우드, 마르지엘라에 열광했지만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사이 '특이한 옷'에 대한 욕심이 옅어졌다.
"어머니가 명품 옷을 종종 입었어요. 젊은 시절에 입던 옷들이지만 여전히 유행을 타지 않고 모양도 그대로 유지되더군요. 그걸 보면서 저도 그런 옷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수십년을 바라보고 만드는 옷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좋은 원단과 부자재를 쓰면 수익을 내기 쉽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그의 고집은 확고하다.
"브랜드의 가치관과 철학이 얼마나 탄탄하느냐를 기준으로 명품이냐 아니냐를 본다면 쟈니헤이츠재즈는 명품이에요. 옷 한 벌에도 이야기를 담아 만들고 있습니다. 한번 사면 30년은 입을 수 있는 그런 옷을 만들고자 합니다."
■‘제너레이션 넥스트’ 출전 이상현 디자이너
디자이너 이상현(33)에겐 특이한 재주가 있다. 두려움이나 기쁨 그 어떤 감정도 똑같은 톤으로 표현하는 게 그것이다. 고급 백화점 하비니콜스가 홍콩점에 그의 옷을 입점시킨다는 소식을 전할 때도 그랬다. 지난달 29일 서울 패션위크에서 신진 디자이너를 위한 프로그램 '제너레이션 넥스트'에 출전한 지 사흘 만에 날아든 낭보였지만 흥분이나 떨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더욱 이상한 점은 그 변함없는 어조가 오히려 확고한 믿음을 준다는 것이다. 디자이너 경력 7년차이니 덤덤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브랜드 '레이'는 사업자 등록을 마친 지 18개월밖에 안 된 신생 브랜드다.
"제너레이션 넥스트는 올해 두번째 참가한 거예요. 지난해 가을에 출전한 뒤엔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고 옷도 더 많이 팔리네요. 남성들이 멋을 낼 줄 알면서 시장도 더욱 다채로워진다는 느낌을 받는 요즘입니다."
서울 압구정동에 문을 연 그의 쇼룸은 작업실과 매장을 겸한다. 그를 포함해 단 4명의 직원이 일하지만 하루에 최대 4∼5벌가량의 옷을 팔 정도로 입소문을 얻어가고 있다. 옷값은 팬츠 20만∼30만원, 재킷은 60만∼70만원, 코트는 70만∼100만원 수준이다.
"디자이너 생활을 쏠리드옴므나 카이아크만 같은 내셔널 브랜드(특정 지역에 국한돼 판매되는 브랜드 보통 국산 브랜드를 지칭한다)에서 시작했어요. 개성을 반영하긴 힘들었지만 '어떤 옷이 잘 팔리느냐'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였죠."
그는 이번 '제너레이션 넥스트' 컬렉션의 콘셉트를 '시선'으로 정했다. 그런데 그 동기가 좀 독특하다.
"전자현미경으로 사진을 보는데 육안으로 보는 것과 정말 달랐어요. 내가 보고 있는 게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발상에서 쇼를 기획하게 됐죠. 그렇게 해서 총 30개의 작품을 만들었어요."
반응은 뜨거웠다. 네덜란드 출신의 한 유명 바이어는 디자이너 이상현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꼭 봐야할 다른 컬렉션을 건너뛰기까지 했다.
한국의 명품이 되기 위해 막 도전을 시작한 그의 꿈은 3년 안에 파리 컬렉션에 진출하는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건축이나 인문학 등 패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분야의 공부도 심도 있게 할 생각이다.
"시대와 대중의 영향을 받는 것보다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 디자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때론 배고프고 힘들더라도요. 어떤 유행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입지를 구축했을 때 비로소 명품으로 인정받는 게 아닐까요."
/wild@fnnews.com박하나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