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편하겠다고요? 그럴리가..” 군복 없는 군인, 사회복무요원
5일 오전 8시30분께 서울 군자동 광진노인종합복지관 내 치매·중풍 등을 앓고 있는 어르신들을 돌보는 광진데이케어센터에 사회복무요원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70대를 훌쩍 넘은 어르신 15명이 오전 9시께 집을 나와 오후 8∼9시까지 머무르는 곳으로, '노치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회복무요원인 전영천(22)·최태웅(22)·전진우(21)·원준호씨(24)는 이곳에서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를 도와 하루 종일 어르신들을 돌보고 있다. 이들은 이곳으로 출근 후 간단한 청소를 끝낸 다음 오전 9시30분께 어르신들을 태운 버스가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어르신들을 4층으로 모시는 것이다. 대다수 어르신이 거동이 불편한 탓에 일일이 부축하고 때로는 업어서 모시기도 한다.
■복지관서 치매노인 돌보미
어르신들이 소파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가운데 전진우씨가 한 할머니를 붙잡고 큰 소리로 날짜와 시간, 이름을 외쳤다. 치매에 걸린 분들의 인지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으로, '지남력(指南力) 강화훈련'이란다. 한두 번으로는 성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적어도 대여섯 차례는 반복해야 한다. 한 분 한 분을 상대하고 나니 금세 30분이 훌쩍 지났다.
이어 운동시간. 운동이라고 해야 30m 남짓한 센터 내 통로를 따라 천천히 걷는 것이 전부지만 넘어져 다칠 우려가 있어 늘 곁을 지켜야 한다. 서너 바퀴를 돌자 할머니·할아버지들의 숨이 가빠온다. 이때 스피커에서 '아리조나 카우보이'라는 1950년대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전진우씨는 "트로트를 싫어해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됐다"며 "매일 듣다보니 웬만한 트로트 노래는 따라부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부터 체조시간까지는 쉬는 시간이다. 지난해 3월 이곳으로 배치받은 최태웅씨가 할머니들 사이에서 연방 싱글벙글하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자세히 들어봤지만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최씨는 "어르신들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경우가 많아 사실 아무런 내용은 없다"면서 "얘기를 들어드리는 것만 해도 위안이 되시는지 좋아들하신다"고 말했다.
사회복지사 조수아씨는 "어르신들에게는 정서적인 친밀감이 중요하기 때문에 얘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며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저게 무슨 일이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직접 해보면 그리 쉽고 만만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20대 초반인 사회복무요원들에게는 더욱 힘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전 10시30분께 체조를 함께 할 강사가 도착했다. 앉은 자리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정도지만 다리를 들어올리기도 버거운 어르신들에게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반 이상은 강사의 작은 동작조차 따라하지 못했다. 한 달 경력의 원준호씨가 한 할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운동을 도왔다. 그는 "친할머니가 7∼8년 넘게 치매로 고생하다 지난해 돌아가셨다"며 "할머니께 잘해 드리지 못한 게 후회로 남아 이곳을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전진우씨는 "가끔 폭력적 성향의 할아버지로부터 맞은 적도 있다"며 "'차라리 몸이 힘든 곳에 지원할 걸'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주시고 휴가가거나 자리를 비웠을 때 저를 찾으셨다는 말을 들으면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회복무요원들을 관리하는 박현희씨는 "처음에는 거부감 때문에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응이 되면 더 열심히 한다"며 "소집해제 후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 봉사활동을 하러오는 전직 사회복무요원이 지금도 서너명 있다"고 설명했다.
체조가 끝나자 최고참인 전영천씨가 화장실을 가려는 두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일어선다. 다른 쪽에서는 점심식사 준비가 한창이다. 사회복무요원들의 머리에는 하얀 모자, 가슴에는 핑크색 앞치마가 둘러졌다. 파킨슨병, 뇌경색으로 고생하시는 할아버지 두 분은 수저도 제대로 들지 못해 사회복무요원들이 식사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섰다. 전씨는 "사실 친할머니·친할아버지의 식사 수발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지난 1년 반 동안 어르신들과 함께 하면서 스스로 어른이 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현역병이나 또래 친구들이 볼 때는 편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마냥 쉽고 편한 것은 아니다"라면서 "사회 한쪽에서 사회복무요원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과 편견이 제일 힘들다"고 애로를 토로했다.
광진노인종합복지관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위치한 구의동 정립장애인보호작업장에서는 사회복무요원 신동준씨(22)가 장애인들의 손과 발이 돼주고 있다. 신씨는 당초 신체검사에서 현역 판정을 받았다가 망막박리 수술을 하는 바람에 재검에서 4급으로 바뀌었다. 지난해 9월 배치돼 6개월 경력에 불과하지만 김목겸 원장은 "우리 직원들의 손이 부족한 부분을 맡아줘 얼마나 소중한 자원인지 모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씨는 "장애인과 정식으로 접촉한 것이 처음이어서 낯설었지만 겪어보니 일반인보다 더 착하고 잘 대해줘서 이제는 '가족'이라고 부를 만큼 익숙해졌다"며 "개인적으로 장애인에 대해 갖고 있던 잘못된 편견을 깨는 기회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씨가 하는 일은 장애인 26명을 돕는 것이다. 이날 3개 작업장에서는 '골판지 감기 공예' 제품을 만들고 있었다. 고무줄로 골판지를 묶고 이를 비닐 포장지에 넣는 아주 단순한 작업이었으나 이들 장애인에게는 쉽지 않았다.
신씨는 건물 1층과 3층에 분산돼 있는 작업장을 오가면서 장애인들이 하기 힘들 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한 손이 자유롭지 못한 분이 7명이나 돼 진행이 느리고 지적장애인들이 많아 아무리 단순한 작업도 열 번, 스무 번을 가르쳐줘야 한다"며 "그래도 '귀찮고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보람있게 병역의무를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신씨는 "모두 열심히 하는 데도 집중력 저하로 오래 일하지 못하고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 복무기간 장애인 형님·누나들을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병무청 사회교육복무과 윤웅섭 사무관은 "정부의 예산이 한정돼 있는 탓에 사회복무요원들이 복지서비스 분야에 투입되지 않을 경우 도움의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어르신들이나 장애인들에 대한 서비스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대다수 사회복무요원들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히 임하고 있는 만큼 일부 '일탈 사회복무요원'에 대한 편견으로 사회복무요원 전체가 매도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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