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①) 공약의 배신, 표심 지쳤다
1부. '정치 혐오증' 트라우마를 깨라 <1> 空約으로 그친 公約… 실종된 약속들
그 시작은 창대하나… 그 끝은 미약하리라…
정치권이 큰 선거 없는 이례적인 해를 맞아 개혁의 '골든타임'을 맞게 됐다. 이에 발맞춰 여야가 혁신위를 가동해 '공천권 내려놓기 및 기득권 포기', 5년 단임인 현행 대통령제를 4년 중임으로 바꾸는 개헌 추진, 당내 선거 투명성을 표방하는 오픈 프라이머리 도입 등 굵직한 개혁안을 쏟아내고 있다. 그럼에도 정치권의 쇄신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정치권의 셀프개혁이 결국 기득권 논리에 막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것이란 우려 탓이다. 파이낸셜뉴스는 지난 2014년 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연중기획 시리즈물인 '우리의 문제는 정치에 답이 있다(우문정답)'를 통해 구태정치의 폐해를 파헤치는 심층보도를 통해 정치권 개혁의 촉매 역할을 자임해왔다. 본지는 '우문정답 시즌2'를 통해 정치권이 풀어야 할 과제뿐 아니라 국민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생산적인 정치를 위한 방안을 살펴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경제성장과 부동산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난무하던 지난 2008년 18대 총선. 수도권 지역 유권자는 '뉴타운 공약'에 환호했다. 뉴타운 공약으로 유권자의 욕구를 정확히 건드렸던 후보들은 국회에 대거 입성했다. 당시 민주당 김근태 의원, 진보신당의 노회찬 전 대표 등 중진급 의원들도 정치신인들이 내세운 뉴타운 공약에 힘없이 무너졌다. 그 후로 4년. 서울시는 뉴타운사업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뉴타운 공약으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던 의원들은 지난 2012년 19대 총선에서 '타운돌이'로 전락, 공천 탈락과 낙선의 쓴잔을 들었다. 공수표 공약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뉴타운의 기억'이 사라진 걸까. '타운돌이'를 교훈 삼아 출발한 19대 국회에서도 지키지 못할 약속들이 속출할 우려감이 높아지고 있다. 공약 추진일정, 재원조달 방안 등과 같은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지 않은 부실 공약은 물론 경기 호황기나 막대한 국가예산의 뒷받침 없이는 실현 불가능한 대규모 건설·토목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의원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후보 시절 승패를 갈랐던 굵직한 공약들은 현실적인 한계에 봉착해 '기억 저편'으로 넘겨버리기 일쑤다. 공천권을 거머쥔 중앙당 역시 공약 이행률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과장된 공약 '무더기 매립지행'
법률소비자연맹이 18대 국회 출범 이후 4년 동안 연인원 2600여명을 투입해 의원들의 공약 이행 여부를 조사한 결과 평균이행률은 59%에 그쳤다. 조사대상의 절반 이상이 50~70%대에 머물렀고 이행률이 80%를 넘어가는 의원은 38명인 것으로 분석됐다.
이들이 제시한 공약은 대부분 대규모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18대 총선 당선자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중앙선관위)에 제출한 공약 추진방법을 보면 건설이나 조성, 유치 등의 건설형 공약이 621개로 가장 많았다. 이어 입법이나 제도화를 내세운 공약은 145개였고, 당연히 추진돼야 할 국책사업과 이미 확정된 사업을 단순히 앞당긴다는 내용이 골자인 합의 도출 및 당연성·단축성 공약도 30개나 됐다.
뉴타운 공약의 후폭풍으로 '타운돌이' 절반 이상을 낙마시킨 19대 총선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실현 가능성에 물음표가 찍히는 공약을 쉽게 찾아볼수 있다는 얘기다. 법률소비자연맹이 제19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중앙선관위에 제출한 5대 핵심 공약을 분석·평가한 결과 역시 건설이나 조성, 유치 등의 건설형 공약이 523개로 가장 많았다. 입법이나 제도화를 내세운 공약은 192개였고 당연성 및 단축성 공약은 45개로 집계됐다.
한 새누리당 당직자는 "출사표를 던진 후보들의 지상 최대 목표는 당선"이라며 "공약의 실현 가능성보다 유권자의 눈에 확 띄는 내용을 제시하는 것이 관건인데 일단 굵직한 사업을 지역에 유치하겠다고 치고 나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눈속임용 남발…당선에 눈먼 의원들
현역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이 후보 시절 내걸었던 공약 이행에 민감하다. 하지만 유권자와의 약속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재선에 대한 불안감이 앞선 형국이다. 같은 지역구에 출사표를 던질 경쟁자가 공약 불이행을 걸고 넘어질 경우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한 개라도 더 공약을 이행했을 때는 다음 선거 때 배포할 홍보물에 한 문장 추가할 내용이 생긴다. 공약의 본질이 약속보다는 당선에 방점이 찍히고 있는 현실이다.
실제 19대 국회의원 임기가 절반을 훌쩍 넘어버린 현재 같은 지역구에서 재선을 준비하고 있는 현역 의원들은 후보 시절 내걸었던 공약 챙기기에 바빠졌다. 최근 재선을 준비하는 의원실 보좌진은 지난 총선 홍보물에 삽입됐던 공약들의 이행상황 점검에 한창이다.
한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보좌관은 "최근 각 의원실에서 자기네 의원이 후보 시절 제시했던 공약이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리스트를 만들며 체크하고 있다"며 "다음 총선에서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는 측면도 있고 유권자에게 의정활동 홍보용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역 의원들의 공약 챙기기는 다음 선거가 다가올수록 지역 민원성 공약에 집중된다. 대표 공약으로 제시했던 굵직한 내용보다는 손쉽게 공약 이행률을 높일수 있다. 급한 불부터 끄자는 속셈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건설·토목 사업과 같이 정부예산이 많이 필요한 사업은 국회의원 임기가 다가올수록 의원들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다"며 "다음 선거를 생각해 당장 공약 이행실적을 높일수 있는 공약부터 해결하고 보자는 식"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정치권의 생리는 공약 이행률이 반영되지 않는 공천 심사 과정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리한 공약을 제시해도 당선만 되면 문제가 없다는 인식이 싹틀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만연하다는 얘기다.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보좌관은 "각 중앙당에서 공천심사를 할 때 현역 의원들의 공약 이행을 하나하나 살펴보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공약 이행률이 공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구조에서는 공약에 대한 의원들의 인식이 재선을 위한 최소한의 수단 정도를 넘어서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공약 검증시스템 도입 실천해야
공약의 핵심은 실천 가능성이다. 구체적인 예산과 추진일정을 갖춘 선거 공약(매니페스토)에 대한 유권자의 인식이 확산되고, 정치권에서도 이에 주목하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19대 총선에서는 후보자 간 정책적 차별성이 오히려 떨어졌다는 지적이 제기돼 개선이 시급하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외과 교수의 유권자 조사에 따르면 19대 총선에서 후보자들이 내세운 공약에 지역주민의 의견이 반영됐다고 응답한 비율은 49.3%인 반면 반영되지 않았다는 응답은 50.7%로 다소 높았다. 또 각 정당이 매니페스토 선거에 소극적이었다는 의견도 73.7%에 달했다.
이에 공약 이행을 점검하기 위한 두 단계 보완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우선 각 당의 공천심사 단계에서 현역 의원들의 경우 지난 총선 때 내세운 공약 이행률을 평가해 공천 심사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키지 못할 공약을 남발해 선의의 경쟁자가 탈락했을 경우 다음 총선 공천심사에서 해당 현역 의원에게 페널티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공약 작성을 위한 상설기구 설치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정당의 정책공약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선관위가 정책개발비 등 국고보조금을 지원할 때 매니페스토 상설기구에 일정 비율을 지원토록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현재 국내 정당은 국고보조금을 받아 정책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지만 실효성 있는 정책공약을 만들고 심사하는 기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진만 교수는 "지난 19대 총선에서 주요 정당은 선거를 한 달도 안 남긴 시점에서 선거공약집을 홈페이지에 게시했다"며 "정책선거를 위해 정당의 준비와 노력을 제고할 방안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한국의 경우 정당 홈페이지를 방문해보면 매니페스토를 제시해놓지 않고 있다"면서 "주요 정당들은 국고보조금을 받아 정책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 운영과 성과에도 많은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relee@fnnews.com 이승환 박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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