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병난과 결혼기념일
2017.11.20 17:17
수정 : 2017.11.20 17:17기사원문
학명 놀리나, 백합목, 미국 텍사스주에서 캘리포니아주를 거쳐 멕시코에 이르는 온대성 사막지대에서 자생. 일명 호리병난의 이력이다. 밑둥이 공처럼 둥글고 위로 쭉 뻗으며 이파리는 난처럼 가늘다. 그래서 난이라는 말이 붙은 모양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4년 전인 1993년 12월 12일은 내가 결혼한 날이다. 그러니까 24주년 결혼기념일이 20일 남짓 남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꽃과 식물을 좋아하는 나는 단칸방 시절 베란다 등 공간이 없어 식물을 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영등포전통시장 앞을 지나다 길가 꽃가게에서 문득 내 눈에 들어온 식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주 작은 호리병난이었고, 이 식물을 '입양'하는 것으로 호리병난과의 동행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밑둥이 엄지손가락만 하고 키도 한 뼘 정도에 불과했다. 비좁은 단칸방에서 창틀에 놓고 키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호리병난은 우리집에 들어오면서 온갖 수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창틀에서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난 게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정도다. 지금까지 4차례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는 이삿짐센터 직원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겨울이면 동사 직전으로 사경을 헤매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이런 고난을 다 몸으로 녹여내면서 지난 24년을 한결같이 우리 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키도 많이 컸다. 지금은 엉덩이 둘레 약 40㎝에 키는 150㎝ 정도다. 호리병난 중에서도 많이 커지지 않는 품종치고는 아주 많이 자란 셈이란다. 특별한 관리 비법도 없다.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에 한 번씩 물을 듬뿍 주고 3년 정도 만에 부엽토 쬐끔 얹어주는 정도였다. 그리고 밑둥이 커져서 화분에 꽉 차면 밑둥에 맞는 크기의 분으로 갈아주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제 스스로 24년을 산 것이나 마찬가지다.
핵가족화와 고령화의 진전에다 나홀로족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세태에 맞춰 가족이나 자식 또는 친구를 대신하거나 함께하는 반려동물 또는 반려식물이 인기다. 나도 요즘 거의 매일 퇴근 후에 이 호리병난과 교감을 한다. 때때로 가족의 대화 소재로 오르내린다. 정말로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 모두 반려인에게 카타르시스와 치유 그리고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가족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이 호리병난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반려식물, 더 나아가 반려가족인 셈이다.
다가오는 결혼기념일에는 이 호리병난에게 좋은 이름 하나 지어줘 진정하고 당당한 가족의 일원으로 맞이해야겠다.
poongnue@fnnews.com정훈식 생활경제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