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있는 평화는 허구다
2018.05.23 17:01
수정 : 2018.05.23 21:23기사원문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으로 평화의 봄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중매를 잘못 서면 뺨이 석 대라더니, 북한이 미·북 정상회담에 앞서 몽니를 부리면서다.
어찌 보면 예견된 사태다. 북한은 그간 핵개발에 세습체제의 명운을 걸었다. 체제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지 못하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게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선 영리한 선택이다. 미국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도 모자라 '영구적 비핵화'(PVID)를 요구하자 남한을 압박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월 정상회담 준비위에서 "남북이 '함께 살든, 따로 살든' 함께 번영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굳이 '따로 살든'이라는 말을 덧붙인 건 문재인정부의 일차적 지향점이 남한 주도 통일이 아니라 평화 공존에 있다는 뜻이다. 현 정부는 역대 정부와 달리 북한 붕괴 불원, 흡수통일 및 인위적 통일 불(不)추진 등 '3-NO' 입장을 강조해 왔다.
평화공존론이 북 세습체제 포기를 전제로 한 박근혜정부의 '통일대박론'에 비해 현실적이긴 하다. 남북에 두 주권국이 존재하더라도 양쪽 주민과 자본이 경계를 넘어 자유로이 오간다면? 이른바 '사실상(de facto) 통일'이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책일 순 있다. 다만 이는 북한 주민에게 자유와 시장화를 허용하는 개혁·개방이 선행돼야 가능하다. 확률이 높아 보이지 않은 전제다.
실제로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이들일수록 김정은이 핵을 내려놓고 개방을 선택할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는 최근 북한이 '비핵국가로 포장된 핵보유국'으로 남으려 할 것으로 봤다. 중국·베트남식 개방 대신 '주민통제가 가능한 개성공단 모델' 확대를 추구할 것이라면서. 김일성대에서 수학한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국민대)도 '개방 없는 시장화'를 점쳤다. "북한 주민이 잘사는 쌍둥이인 남한의 진면목을 알면 북 체제가 무능한 증거로 인식할 것"이라는 게 근거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더 많은 지참금(체제보장)을 바라는 북한과 보다 확실한 혼수(비핵화)를 기대하는 미국 간 밀고 당기기가 한창이다. 우리로선 트럼프·김정은 대좌가 성사돼도 마음을 놓아선 안 된다. 혹여 트럼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에 필이 꽂혀 있음을 김정은 위원장이 눈치채고 있다면? 뉴욕타임스의 관측처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수준의 비핵화 약속'을 할 공산이 크다. 북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만 없애고 기존 핵무기 폐기를 '단계적 감축'이라는 식의 외교적 수사로 미봉한 채….
핵을 완전히 버리지도, 반쯤의 개방도 않으려는 북한과의 공존이 평화로울 리는 만무하다. 크리스토퍼 힐 전 미 국무부 차관보는 '김정힐(김정일+힐)'이라는 말을 들었던 대화파였다. 그런 그도 "평화협정은 북한 비핵화가 실제 이뤄진 뒤 마지막 단계에서 이행돼야 한다"고 했다. 흘려들어선 안 될 충고다.
문재인정부는 미·북 간 어정쩡한 타협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보수층 일각의 걱정처럼 북한에 의한 적화는 기우라 치자. 하지만 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도 북한과 동거할 상대는 미국이 아니라 우리다. 북핵의 인질이 된 상태에서 분단체제가 장기화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무슨 수로든 막아야 할 것이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