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루 종일 서서 일한다"

파이낸셜뉴스       2018.06.26 13:50   수정 : 2018.06.26 13:50기사원문
(상) 
  -제대로 앉지 못하고 일하는 유통산업 판매직 75% 
  -하지정맥류, 무지외반증 각종 질환 달고 살아 
  -관련 법안 국회 발 묶여, 정부는 의자설치 ‘강제’ 어려워 

유통업체 판매직 상당수 근로자들은 서서 일한다. 이들이 근무하는 매장에는 대부분이 의자가 없으나 설사 있더라도 서비스는 ‘서서’라는 인식이 이들을 앉지 못하게 만든다. 장시간 서서 근무하는 이들 중 일부는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고 다른 일부는 발가락이 구두모양으로 뒤틀어지기까지 한다.

파이낸셜뉴스는 '앉을 권리'를 주제로 판매직 근로자들의 근로환경에 대한 문제점 및 개선책 등을 짚어 본다. <편집자 주>



인천공항 한 면세점에서 근무하는 A씨는 오전 6시30분부터 오후 3시30분까지 9시간 가량 일한다. 15년 경력의 베테랑으로 진상고객이 방문해 욕설을 해도 참을 수 있다. 정작 참을 수 없는 고통은 따로 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건 15년이 지나도 견디기 어렵다. A씨는 “인력이 부족해 매장을 비우기 어렵다”며 “손님은 밀려들고 앉을 수는 없고 다리를 두드려가며 일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A씨가 9시간 근무동안 앉을 수 있는 시간은 1시간 남짓 점심시간과 고객이 없는 틈을 타 쉬는 40분 정도다. 다리가 아프면 면세점 내 의자가 없어 공항 벤치에 앉는다. 그래도 허리가 저리는 고통에 절로 끙끙대는 소리가 나온다. A씨는 “비좁은 매장에서 주구장창 4시간씩 서 있어야 한다. 의자는 아예 없다”며 “직원들 중 하지정맥, 무지외반증 같은 질환을 겪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근골격계 질환 고위험군 45%

매장 내 의자가 없거나 의자가 있어도 앉을 수 없다고 토로하는 근로자는 10명 중 7명에 이른다. 최근 정부는 유통업체를 대상으로 의자 및 휴게실 구비 캠페인 및 정책을 내놨지만 법적 강제성이 없어 실제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다.

26일 서울노동권익센터 ‘2015 유통산업감정노동연구’에 따르면 근무지 내 의자 없이 일하는 유통종사자는 약 36%로 나타났다. 의자가 있어도 눈치 때문에 혹은 불편해서 제대로 앉을 수 없다는 응답도 약 35% 정도다. 특히 면세점과 쇼핑몰 내 입점업체 경우 70% 내외가 의자가 아예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문가는 의자가 없는 장시간 노동은 몸에 악영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정혜선 카톨릭대 의대 예방의학 교수는 “판매직 중 목, 허리, 다리 등 근골격계 질환이 흔하다”며 “서비스를 위해 긴장된 상태로 서있으면 배로 힘들고 피로도가 굉장히 높다”고 우려했다. 국가인권위원회 ‘2015 유통업 서비스·판매 종사자의 건강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근골격계 질환 유병율 고위험군은 약 45%이다.



■정부 캠페인 불구, 실효성 '글쎄'

고용노동부는 지난 4일 ‘판매직 노동자 건강보호 대책’을 수립했다. 판매직 노동자를 위한 사업주 및 고객 인식 전환 캠페인, 건강 가이드라인 보급, 휴게실 및 의자 점검 등이 주요 골자다. 박영만 산재예방보상정책국장은 “의자를 비치하고, 노동자에게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사업주의 의무를 넘어 고객의 인식 전환도 중요한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정부 노력이 실질적 ‘의자비치’ 보단 캠페인에 그칠 수 있다는 점이다. 노동부 산업보건과 관계자는 “(사업주를) 지도할 수 있으나 (법적 처벌조항이 없어) 처벌은 없다”며 “현장에서 지속적인 지도를 하겠다”고 전했다. 이어 “산업안전관련 법안에서 단순히 서있는 것에 대해선 근골격계 부담작업으로 보지 않아 법적 강제가 어렵다”고 덧붙였다.

노동계는 법적 뒷받침이 없다보니 의자를 구비하는 사용주 노력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현행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80조에는 의자비치 규정이 존재하지만, 사업자의 관리감독 의무가 없는 자유규정이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교수는 “의자배치는 인권이다. 캠페인이 아니라 강제성을 둔 규정을 명문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의자 구비를 명시한 법안은 제자리걸음이다. 지난해 12월 원유철 자유한국당 의원은 ‘앉을 권리법’(산업안전보건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발의했지만 여전히 상임위에서 계류 중이다. 원 의원은 “최소한의 인간 권리를 보장해야겠다는 마음에 법안을 만들었다”며 “조속히 통과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junjun@fnnews.com 최용준 기자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