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패권 경쟁과 미국의 딜레마

      2021.09.08 18:13   수정 : 2021.09.08 18:13기사원문
최근 미국 상원을 통과한 혁신경쟁법(USICA)은 미국의 기술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종합법안이라 할 수 있다. 총 2376쪽에 달하는 이 법안은 반도체 산업 육성과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 과학기술 분야 연구 및 교육에 대한 투자 확대, 중국 통신장비에 대한 미국의 의존도 감축과 중국의 시장교란 행위를 제재하고 안보위협에 대한 조치를 망라한다.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법안 마련에 미국 의회가 초당적 지지를 보낸 것이며 이는 미국의 민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혁신경쟁법에 대한 미국 내 반응은 엇갈린다. 미국 상공회의소를 비롯한 산업계는 기술혁신과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국가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인 반면 학계와 연구기관은 이 법안이 이미 실패한 산업정책을 다시 소환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어설픈 산업정책과 불완전한 정부의 개입으로는 국가 주도의 경제체제를 갖춘 중국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을 뿐 아니라 비용절감과 상품개발 등 시장경제에서 더 효과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민간부문을 위축시켜 오히려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중국과의 기술패권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미국의 딜레마는 커진다.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경기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것이다. 기존 시장경제체제와 다자무역체제의 규범으로는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이후 공공연히 드러내는 중국의 기술패권에 대한 야망을 꺾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회원으로 가입할 때만 해도 미국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낮은 임금에 풍부한 노동력을 가진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수행하면서 기존의 세계경제 질서에 편입되면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였고, 실제로 세계교역과 경제성장에 중국의 기여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예상과 달리 중국은 기존 시장경제체제에 편입되기보다는 이를 활용해 국가주도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공고히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혁신경쟁법은 중국과의 경쟁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미국의 새로운 대응방식을 제시한다. 디지털 전환기에 경제와 국가안보에서 첨단기술의 중요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디커플링은 핵심산업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소극적인 대응책일 뿐이다. 혁신경쟁법을 통해 미국은 중국의 방식으로 경기를 치르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개입과 보조금 등 국제무역 규범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민간에만 맡겨서는 거대한 중국의 국가 주도 기술개발 방식에 대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혁신경쟁에서 미국이 승리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찬성론과 그 방식으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반대론이 공존하는 이유다. 혁신경쟁법의 배경에는 무엇보다 TPP 협정 타결 직후 "21세기 세계 경제질서는 중국이 아닌 미국이 써야 한다"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해온 메가 FTA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를 이용한 무역전쟁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전정부적이고 국가적 대응이라는 미국의 새로운 경기방식이 국제통상질서의 재편과 우리 기업들에 미칠 영향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정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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