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향한 그리움이 짙어질때, 그의 곁엔 애견 해피가 있었다
파이낸셜뉴스
2025.01.07 18:58
수정 : 2025.01.08 09:30기사원문
(2) 다시 찾은 孤島, 하와이에서의 삶
"난 단지 쉬러왔을 뿐" 망명 아닌 망명
옛 동지를 만나거나 예배로 일상 보내
애견 해피위한 외출이 가장 큰 나들이
귀국 늦어지자 병세는 더욱 나빠졌다
1960년 5월 29일 오후,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탄 비행기가 김포를 이륙해 하와이로 날아가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난리'가 났다. '하야한 이승만 박사 부부가 새벽같이 쥐도 새도 모르게 망명해 버렸다'는 언론 보도 때문이었다. 한 달 전인 지난 2024년 12·3 계엄 사태를 맞은 것처럼 경천동지할 충격이었다.
5월 29일 경향신문 석간은 4면 중 3면 전체를 할애해 특종 보도를 했고, 다른 언론사들은 뒤늦게 이를 받아 쓰며 이 박사 부부를 차갑게 대했다. 국회도 마찬가지였다. 한 정치인은 이승만 박사가 수천만달러를 미국으로 빼돌렸다고 주장했고, 31일 김용갑 재무부 차관은 집권 12년간 1990만달러를 유용한 혐의로 이 박사를 기소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권좌에서 추락하면 으레 겪어야 하는 수모의 인간사일 것이다.
기내에 올라간 오중정 총영사가 본 광경은 텅 빈 기내의 맨 뒷줄 가운데에 노 부부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독립운동을 함께한 제자이기도 했던 오중정 총영사의 인사를 받고 이 박사는 반가워하며 "내가 여기 좀 쉬러 왔어. 한 3주일 쉬고 갈 거야. 오 영사"라고 했다. 트랩에서 내리는 이 박사 부부의 안전한 이동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 경호 관계자들이 환영 인파와의 일정한 거리를 만들었다. 그러자 이 박사는 "이게 무슨 말이야. 내 동포에게 내가 못 간다니" 하며 군중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하와이 유력 일간지 '에드버타이저' 5월 30일자 신문은 당시 85세 고령의 이 박사가 한국 정부에서 주장하는 공금 유용설과 망명설을 전면 부정하며 "난 단지 쉬러 왔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승만의 제자이자 하와이에서 조경 사업으로 성공한 윌버트 최씨의 별장이 이 박사 부부의 숙소로 제공됐다. 모두가 3주 정도 머물다 귀국할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기록은 1988년에 출간한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록 '대통령의 건강'에도 있다. "하와이에 도착한 후 독립운동 당시의 옛 동지들과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된 대통령은 한결 즐거운 듯했고 건강도 좋아지는 듯싶었다. 우리는 별장에서 기거하며 옛 동지들과 제자들의 방문을 받기도 하고 초대에 나가기도 했다. 매주 일요일에는 독립운동 당시 대통령이 창립한 한인기독교회에 참석하여 다정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봤다."
그러나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갔다는 것은 세 번에 불과했다. 당시 하와이 주재 조선일보 통신원 차지수씨의 기사를 살펴보면 이 박사가 망명 생활 동안 공적 모임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다섯 차례에 불과했다. 교회에 세 번, 해양대학 훈련생의 하와이 친선 방문 때 한 번, 교포 목사 딸의 백일 잔치 때 한 번이다. 오중정 총영사는 애견 해피를 위한 세 번의 외출이 가장 큰 나들이였을 것이라고 했다. 윌버트 최씨의 별장에서 머물던 이 박사 부부의 귀국이 계속 미뤄지자 측근들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한국에 두고 온 애견 해피의 미국행이었다. 뭉툭한 코에 처진 귀와 드문드문 노란 점이 있던 이 개는 슬하에 자식이 없던 이 박사 부부로부터 끔찍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하와이로 출국하기 전에 프란체스카 여사는 편정희 여사에게 "한 달만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하며 맡겨 놓았다. 편 여사로부터 애견 해피가 하와이에 도착했지만 하와이 주법에 의해 120일간 검역 구역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 시기에 이 박사는 애견 해피를 면회하기 위해 세 번이나 외출을 감행했다. 말년에 이 박사의 공식 외출이 다섯 번에 불과했으니, 그가 해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양복 차림의 이 박사가 가건물 외벽을 등지고 앉아 해피를 안고 찍은 사진은 이 무렵의 것이다.
하야 후 하와이에 도착했던 그해 연말부터 이 박사는 이유 없이 귀국이 늦어지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보행에 불편을 느껴 부축을 받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노인성 질환으로 자주 트리풀러 육군병원을 다녀야 했다. 길어야 한 달일 것으로 믿고 간단한 옷가지만을 챙겨왔던 이 박사 부부로서는 별장에서의 체류 기간이 하염없이 길어지며 6개월로 접어들자 한계를 절감하기 시작했다. 측근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바닷가 별장과 시내의 거리가 문제였다. 차로 달려서 병풍처럼 높은 산을 넘어 40분 이상이나 달려야 시내로 갈 수 있었다.
이 박사 부부를 친부모님처럼 모셨던 최백렬씨와 오중정 총영사 그리고 윌버트 최씨 등이 머리를 맞댔다. 마침 윌버트 최씨가 매각하려 내놓은 마키키가 2033번지의 20평이 조금 넘는 목조 건물 한 채가 있었다. 교포들은 이 박사 내외의 거처를 이곳으로 옮기도록 주선했다. 교민들은 자신들이 쓰던 가구며 생활에 필요한 집기들을 가져다주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감사를 표시하며 받아들이는 동안 이 박사는 "누구한테 받은 것인지를 잘 써 두었다가 나중에 꼭 돌려주어야 해"라며 잔소리를 했다. 여기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부부의 마키키가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연 건국 대통령 부부를 이렇게 홀대하는 국민들은 결코 좋은 지도자를 만날 수 없을 것이고 후임 대통령들조차 노후가 편치 않게 될 것이었다. 최근에 우리가 겪고 있는 바처럼.
이동욱 전 KBS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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