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사람인데...왜 존재 부정하나요" 산재 '인정' 향한 외침
파이낸셜뉴스
2025.10.20 17:47
수정 : 2025.10.20 20:58기사원문
반도체 공장 노동자 정향숙씨·쿠팡 노동자 고(故) 장덕준씨 모친 박미숙씨 인터뷰
"국가도, 기업도, 공단도 밝히지 못한 업무상 질병을 피해자더러 입증하라니. 말이 되나요?"
한 반도체 공장에서 21년간 일하다 3년 전 '거대세포종' 진단을 받은 정향숙씨(48)의 하늘은 지난 6월 또 한 번 무너졌다. 근로복지공단 산하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 재심마저 '인과관계 없음'으로 산업재해 불승인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거대세포종은 100만명당 1~2명꼴로 발생하는 희귀질환임에도 정씨는 같은 공장 근로자에 이어 두 번째 피해자가 됐다.
질판위 위원들은 대피 여부나 자연과학적 근거를 들어 '전리방사선' 등 유해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됐다는 정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씨는 "수술을 세 번 하고 난 후 왼쪽 귀가 아예 안 들리고 음식을 씹는 것도 힘든데, 불승인 소식을 듣고 펑펑 울었다"며 "20년을 넘게 일했는데 이것조차 인정이 안 되나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고 울먹였다.
법원은 이미 업무상 질병의 '규범적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판례를 여러 차례 제시했다. 지난 8월 서울행정법원은 2021년 급성 골수성 백혈병 판정을 받은 삼성디스플레이 근로자의 요양불승인처분을 취소하며 “희귀질환이나 첨단산업현장 질병의 경우, 발병 원인과 질병 간 인과관계를 현재 의학 수준에서 명확히 규명하기 어렵더라도 쉽게 부정할 수 없다”고 판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 인력의 3분의 2 이상이 의학 전문가로 구성된 질판위의 경우 의학적 인과성 판단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질판위의 암 산재 인정률은 50%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첨단산업 노동자들의 경우 소송으로 가야만 산재 피해를 인정받는 구조다. 공단 본부 심사위원회나 고용노동부 재심사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하는 방법도 있지만, 구제 건수는 사실상 ‘제로(0)’에 가깝다.
이종란 노무사는 "매년 직업성 암 환자로 추정되는 인원 중 10분의 1도 산재를 신청하지 않는 상황"이라며 "최소한 국가는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 믿었는데,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피해자들에게는 큰 상처로 남는다"고 설명했다.
■"왜 피해자가 증명해야 하나"
2020년 10월 12일, 쿠팡에서 일하던 고(故) 장덕준씨를 급성 심근경색으로 떠나보낸 어머니 박미숙씨(57)의 고통도 현재진행형이다. 아들이 축구장 2배 면적의 물류센터에서 새벽 4시까지 쉬지 않고 야간노동을 하다 사망했는데도 당시 쿠팡이 물었던 과태료는 10만원이 전부였다고 박씨는 울분을 터트렸다.
200시간이 넘는 폐쇄회로(CC)TV 영상을 보며 쿠팡의 주장에 반박하느라 박씨는 아들의 죽음에 충분히 슬퍼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는 "5년 동안 싸우면서 아들, 건강, 재산 다 잃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없는 사람들은 더 죽어 간다. 우리 집은 경매 절차가 진행 중이고 싸움이 더 길어지면 가정도 해체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우리 법은 산재 및 과로사 입증 책임을 피해자에게 지운다. 반면 회사는 피해자 측에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사례도 상당수로 전해졌다. 다른 근로자들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인 상황에서 증언하기가 쉽지 않다. 박씨는 "기업들이 유족에게 정보를 공개하도록 의무화하는 국가적 대책 마련이 간절하다"고 호소했다.
쿠팡이 유족들과 합의에 나선 것은 올해 1월 국회 청문회를 앞둔 시점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냉·난방시설 설치 △위급 시 신고 위한 물류센터 내 휴대전화 반입 △휴게공간 확충 등 노동환경은 대부분 개선되지 않았다고 유족들은 주장한다. 박씨는 "누구나 (산재)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노동자가 사고를 당해도 회사가 지는 책임의 강도는 약한 현재의 노동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yesji@fnnews.com 김예지 박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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