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연금개혁, 파탄과 성공의 갈림길
파이낸셜뉴스
2025.10.21 17:53
수정 : 2025.10.22 10:54기사원문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하나'
벨기에, 거리로 번진 연금개혁 반대 시위
프랑스, 거센 반발에 두손 두발 다 들고 연금개혁 유예
한국, 숫자만 바꾼 '모수개혁'의 한계…청년세대는 부글부글
반면, 덴마크·스웨덴은 자동조정장치 등 '구조개혁'…신뢰의 정치
시작부터 '쓴 맛' 보고 있는 벨기에
14일(현지시간) 벨기에 노동단체들은 정부의 연금개혁과 긴축정책에 항의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프랑스 AFP통신 등에 따르면, 수도 브뤼셀 북역과 남역 사이에서 열린 집회에 경찰 추산 약 8만명이 참가해 '65살에 연금 받을 권리' 등 문구를 적은 팻말을 들고 정부의 정년연장 방안을 규탄했다. 조합원 약 150만명을 보유한 벨기에노조총연맹(FGTB)의 티에리 보드송 위원장은 "시민들을 진짜 움직이게 만드는 건 연금 문제"라고 말했다.
벨기에 정부는 법정 은퇴 연령을 현재 65세에서 2030년 67세까지 단계적으로 올리고 공무원 조기 퇴직을 제한하는 등 연금개혁을 중심으로 긴축재정을 추진 중이다. 벨기에의 올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 예상치는 약 5.5%로, 유럽연합(EU) 회원국 가운데 루마니아·폴란드·프랑스에 이어 네 번째로 높다.
결국 한 걸음 물러난 프랑스
같은 날 프랑스 정부는 대국민 반발을 수습하기 위해 정년연장 계획을 유예했다. AFP 등에 따르면,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역점 사업으로 추진해온 연금개혁과 관련해 "다음 대선 이후로 연기할 것을 의회에 제안하겠다"며 "현재부터 2028년 1월까지 정년연장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제안은 르코르뉘 총리가 임명 27일 만에 사임했다가 나흘 만에 재임명됐을 만큼 극심한 프랑스의 정치적 불안정을 타개하기 위한 '양보 카드'로 풀이된다. 마크롱 대통령이 야당과 여론의 거센 반발에도 2023년 9월 시행을 밀어붙였던 연금개혁은 연금 수령 연령을 기존 62세에서 매년 3개월씩 늘려 2030년 64세가 되도록 하고, 연금을 100% 받기 위해 납입해야 하는 기간도 2027년부터 43년으로 1년 늘리는 걸 골자로 했었다.
또 르코르뉘 총리는 이날 "연금개혁 중단에 따른 비용이 2026년 4억유로(약 6630억원), 2027년 18억유로(약 2조9860억원)로 추정된다"며 "다른 곳에서 아껴야 한다"고도 밝혔다. 이에 주요 외신도 "GDP의 5.8%에 달하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긴축 예산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켜야 하는 최대 난관이 남아 있다"고 거들었다. 프랑스의 공공 부채는 GDP의 114% 수준으로, 유로존(유로 사용 20개국)에서 그리스와 이탈리아 다음으로 높다.
이러한 난국에 17일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결국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한 단계 하향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 9월 12일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내린 결정과 같다.
일단 밀어붙인 연금개혁 후폭풍 온몸으로 맞는 한국
한국은 지난 3월, 18년 만에 연금개혁을 단행했다. 보험료율은 13%, 소득대체율은 43%로 상향 조정하는 개혁안이었지만, 숫자만 조정하는 '모수개혁'에 그쳐 재정 안정화 등을 위한 근본적인 개혁은 특위로 미루는 극명한 한계를 보였다. 이로 인해 정부 장기 재정전망(2025~2065년)에 따르면, 국민연금 기금은 2048년에 적자 전환, 2064년엔 소진될 것으로 예측됐다.
이에 청년 세대의 불만이 증폭됐다. 지난 7월 8일 국민연금공단 산하 국민연금연구원이 발표한 '국민연금 인식에 대한 키워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대 '스누라이프', 고려대 '고파스', 서강대 '서담', 디시인사이드, 네이트판 등 커뮤니티에서 '기금 고갈', '폐지', '탈퇴', '이민', 심지어는 '폰지사기'와 같은 키워드들이 연금개혁 담론을 지배했다. 연구진은 "MZ세대의 불신과 우려가 상당하며 특히 기금 고갈에 대한 걱정이 두드러진다"면서 "연금 제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개선할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청년들은 국민연금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느낀다"며 "저부담 고급여 체계가 유지된다면 본격적인 수급 시기에는 연금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청년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자동조정장치 등 세대 간 형평성을 보완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며 "이런 조치들(자동조정장치 도입 등 '구조개혁')이 '국가가 존재하는 한 지급은 보장된다'는 신호가 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순항 중'인 덴마크와 스웨덴
이는 2006년 연금개혁과 그로써 합의된 장기적 로드맵에 따른 결과다. 덴마크는 2006년부터 기대수명과 은퇴 연령을 자동으로 연동시켜 5년마다 연금 수령 시기를 조정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윤 위원이 앞서 설명한 자동조정장치에 해당되는 것인데, 이 같은 구조개혁으로써 공적 연금의 재정 안정성을 확보한 것이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확립된 연금 제도 덕분에 덴마크는 2022년 머서 CFA 연구소 글로벌 연금 지수가 제도의 △적절성 △지속 가능성 △무결성을 평가한 결과 전체 지수 값에서 A등급을 받았다.
스웨덴 또한 조기 합의로 위기를 극복한 케이스다. 1990년대 초 스웨덴은 은행 부실과 부동산 거품 붕괴로 국가 부도 직전까지 몰렸으나, 정치권이 정파를 초월해 '재정개혁위원회'를 구성하며 위기에 대응했다.
위기 대응의 핵심은 역시 사회적 합의와 체계적인 장기 로드맵 구축이었다. 스웨덴은 연금제도를 소득 연동형으로 전환했고, 고령화에 따라 지급액이 자동으로 조정되도록 설계했다. 이같이 발 빠른 조치 덕분에 스웨덴은 2000년대 들어 재정 흑자국으로 전환됐고, 공공부채 비율도 80%대에서 30%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