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전하는 말' 양인자, 임영웅처럼 리메이크 "이젠 승인 절차 없이 마음껏 해주세요”

파이낸셜뉴스       2025.11.03 14:38   수정 : 2025.11.03 20:18기사원문
임영웅, 김희갑 양인자 '그 겨울의 찻집' 리메이크







[파이낸셜뉴스] “스크린에서 남편의 인생을 다시 보니 ‘내가 정말 위대한 사람과 살았구나’ 싶네요. 영화를 보면서 여러 번 울컥했고 감동했습니다.”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CGV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바람이 전하는 말’ 시사회. 국민 작사가 양인자(80)가 차분한 목소리로 남다른 소회를 밝혔다. 그의 곁에는 남편이자 국민 작곡가 김희갑(89)이 있었다.

혈관성 치매로 말을 잇기 어려운 김희갑은 이날 “가슴이 벅차고 감사하다”고 짧지만 진심 어린 소감을 전했다.

“늘 노래 뒤에 계셨던 분… 살아서 박수받게 해드리고 싶었죠”


오는 5일 개봉하는 '바람이 전하는 말'은 한국 대중가요의 정수를 써낸 작곡가 김희갑의 인생과 사랑을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다. ‘노무현입니다’의 각본을 쓴 방송작가 출신 양희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1955년 미8군 무대 기타 연주자로 음악 인생을 시작한 김희갑은 지난 60여 년간 3000곡을 작곡하며 한국 대중가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송창식의 ‘상아의 노래’, 양희은의 ‘하얀 목련’, 김국환의 ‘타타타’, 뮤지컬 ‘명성황후’의 ‘백성이여 일어나라’까지 포크, 발라드, 트로트, 록,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시대별 대표곡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단순한 히트곡을 넘어 세대의 감성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양인자와 협업한 ‘킬리만자로의 표범’(조용필)과 ‘향수’(박인수·이동원)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 절정으로 꼽힌다.

양희 감독은 “젊을 땐 거의 잠을 안 주무셨다고 한다”며 “새벽 4시부터 오전, 오후로 녹음하고, 밤에는 세션맨으로 기타를 연주하면서 쪽잠을 자며 작곡하셨다. 가수의 목소리에 맞춰 곡을 쓰셨고, 혹시라도 표절할까 봐 자신의 노래도, 남의 음악도 잘 듣지 않으셨다고 한다”며 그의 창작 비밀을 전했다. 또 “대가이지만 언제나 아이처럼 배우는 분이었다. 70~80대에도 골프, 스키, 산악자전거, 사진을 새로 배우며 자신을 리셋했다. 그런 열린 자세가 위대한 창작자의 원천이었다”고 덧붙였다.

양인자 역시 “남편은 영화음악이 지겨워지면 가요를, 가요가 지겨워지면 뮤지컬을 했다”며 “언젠가 ‘당신은 전생에 모차르트였던 거 아니냐’고 묻자 가곡을 많이 쓴 ‘슈베르트였을 것’이라 하더라”고 회상했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리고 화양연화의 순간


영화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김희갑의 생애, 그의 음악을 부른 가수들의 이야기 그리고 부부의 사랑을 담았다. 첫 장면은 조용필의 공연이다. 2023년 5월 잠실 공연은 김희갑과 양인자가 함께 관람한 마지막 무대였다.

“조용필 공연은 매년 표를 사서 가셨죠. 그날은 마침 앙코르 곡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어요. 무대 조명이 꺼졌다가 다시 켜지며 전주가 흐르는 순간, 관객들이 폭발하듯 환호했죠. 그 장면이야말로 김희갑 선생을 가장 잘 표현하는 순간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조용필 측에 영상을 부탁드렸죠.”

조용필은 극중 인터뷰에서 김희갑에 대해 “참 따뜻한 분”이라며 “굉장히 점잖고 젠틀하시다. 그래서 멜로디가 따뜻하고 달콤하며 사람들의 귀에 익은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어 양인자의 글을 높이 사며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가사는 정말 획기적이었다”고 덧붙였다.

양인자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나를 위로하려고 쓴 노래”라며 “누구나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질문을 품고 살잖나. 그래서 그 노래를 되풀이해 듣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개봉까지 10년 "1년간 촬영 중단되기도"


양희 감독은 양인자와 선후배 관계로 지내다 2006년 김희갑 40주년 헌정음악회 ‘그대, 커다란 나무’를 계기로 부부와 돈독한 사이가 됐다. 이번 작품은 “왜 저렇게 위대한 음악가를 아무도 기록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애초 영화화를 염두에 두지 않아 제작비 없이 시작했으며, 그 사이 김희갑이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양인자의 건강 악화까지 겹치면서 촬영이 1년가량 중단되기도 했다. 결국 개봉까지 10년이 걸렸다.

"김희갑 선생님 인터뷰는 지난 2016년과 2022년 두 차례 진행됐죠. 평소 달변가는 아니라서 2016년 인터뷰 당시 기타를 가지고 와 품고 안고 계시라고 했어요. 세팅하는데 시간이 길어지니까 갑자기 기타를 튜닝하더니 즉흥 연주를 하시더라고요. 그때가 한국 나이로 80세였어요. 정말 예상치 못한 감동적인 순간이었죠."

"2020년 한차례 쓰러졌다 깨어나신 뒤 2022년 인터뷰를 하는데, 영화에서도 나오듯, 기억을 잘 못하시더라고요. 어느 날 양인자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소멸해가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요. 약 1년간 촬영을 거부했지만, 결국 다시 담았어요. 우리 인생도 언젠가 그렇게 사라질 테니까요. 극중 눈 오는 장면이 두 분을 만나러 갔다 못찍고 온 날이죠.”

"조용필 인터뷰는 정말 섭외가 힘들었어요. 그분께 직접 가닿기까지 거의 2년이 걸렸죠. 제천영화제 버전에는 조용필 인터뷰가 없었어요. 그런데 개봉이 다가올수록 두 분의 대표작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인데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양인자 선생님 큰딸께 섭외를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곧바로 하겠다고 답변이 왔죠."

양 감독은 “제작비 없이 시작해 더 힘들었다”며 “관두고 싶을 때면 두 분을 만나러 갔고, 우리가 죽어도 노래는 남는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 잡았다”고 돌이켰다. “양인자 선배가 '네가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해줘 기뻤어요. 기자회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여한이 없었죠. 늘 노래 뒤에 계셨던 선생님이 살아서 관객 박수를 받았으니까요.”

“두 사람은 여전히 사랑하고, 음악 동반자"


영화의 후반부는 김희갑과 양인자의 사랑 이야기다. 양희 감독은 “아직도 두 분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며 “김희갑 선생님은 쓰러지기 전까지 늘 아내의 운전기사 역할을 하셨다”고 회상했다.

두 사람은 ‘언제 우리가 만났던가’로 시작하는 ‘작은 연인들’(1979)부터 시작해 함께 만든 곡이 약 400곡. 양인자는 극중 인터뷰에서 “김희갑이 직접 연락해와 혜은이의 '열정' 등을 써서 보여줬는데, 열심히 하겠다고 하셨다"며 "신인이나 다름없던 제게 당대 유명 작곡가가 그렇게 겸손하게 말해 인상적이었다”며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극 중 김희갑은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가사를 보고 나서부터 양인자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게 됐다”며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라는 가사에서 왠지 쑥스러웠다. 노랫말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협업은 철저히 존중에 기반했다. 김희갑이 곡을 먼저 쓰면 양인자가 가사를 붙이고, 반대로 가사가 먼저 나오면 곡을 붙였다. 서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서랍에 넣었다고 한다. 양 감독은 “두 분이 작업 말미에서야 ‘콩나물 하나 더 넣자’, ‘단어 하나만 바꾸자’ 정도로 수정 요청하며 작업했다”고 전했다.

“이 영화는 결국 사랑 이야기”


양희 감독은 “이 영화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어느 날 양인자 선생님께 유언이 뭐냐고 물었더니 ‘노래 속에 이미 다 남겨놨다’고 하셨어요. 바로 ‘바람이 전하는 말’의 마지막 가사,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였죠."

앞서 영화제를 통해 선공개됐을 당시 특히 50대 남성 관객의 반응이 뜨거웠단다. 그는 "살다보니 다들 거칠어졌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애틋했던 시절이 있잖냐"고 말했다.
"그런 기억을 영화 속 노래를 통해 떠올리길 바랐죠. 그 기억이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젊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바로 두 분이 남긴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인자는 언론 시사회 말미 “우리 노래를 복잡한 승인 절차 없이 마음껏 리메이크해 달라”고 당부했다. 양희 감독은 "임영웅이 ‘그 겨울의 찻집’을 다시 불러줬듯,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노래가 남는다면, 그게 예술가의 행복 아닐까요”라며 미소 지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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