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웅 '서편제' 정동길 물들인 명창들의 절창

파이낸셜뉴스       2025.11.04 00:05   수정 : 2025.11.04 15:35기사원문
9일까지 국립정동극장









[파이낸셜뉴스] “와. 이럴 수가” 지난 1일 서울 중구 정동극장 ‘서편제:디 오리지널’ 공연장. 휴식 시간을 맞아 점등되자 옆자리 관객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뒷자리 관객은 공연 내내 훌쩍이며 우리 소리로 풀어낸 소리꾼 부녀의 이야기에 푹 빠진 모습을 보여줬다.

국립정동극장 30주년 기념공연 ‘서편제’는 못다 이룬 소리꾼의 꿈을 딸을 통해 완성하려는 아비와, 눈이 먼 고난을 예술로 극복한 소녀를 중심으로 인간의 한(恨)과 예술의 길을 그린다.

이 작품은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귀토-토끼의 팔란’ 등으로 창극의 새 지평을 연 고선웅 연출과 한승석 음악감독이 다시 호흡을 맞춰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다. 고 연출은 부제에 ‘디 오리지널’을 달아 원작의 미학과 소리의 본질에 충실하겠다는 연출 의도를 드러냈다.

정동극장 30주년 ‘서편제: 디 오리지널’, 소리로 부활한 한(恨)의 서사


전라남도 보성의 외진 마을, 한 사내가 주막으로 들어오고, 주인 ‘냉이’가 술상을 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내는 소릿재 주막의 내력을 묻고 그와 소리로 소통하던 냉이는 옛 기억을 떠올린다. 냉이는 세 개의 원형 무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네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사내는 딸의 눈을 멀게 한 아비의 모진 선택에 분노하는 대사를 통해 관객의 심경을 대변하면서 2막에서 드러나는 숨은 또다른 이야기도 들려준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단단한 소리의 힘에 있다. “다소 시대에 뒤떨어질 수 있는 서편제의 내용이 명창들의 힘으로 살아나는 느낌”이라는 한 관객의 평처럼 주역 소리꾼들의 다양한 결의 소리가 극장을 꽉 채운다.

국악 기반 얼터너티브 팝 밴드 이날치 멤버인 아비 역 안이호는 폭력적이고 완고한 아비의 성격처럼 두텁고 갈라진 듯 거친 목소리로 소리에 대한 집착과 광기, 예술을 향한 끝없는 집념을 드러낸다. 국립창극단 단원인 ‘소녀’ 역 김우정은 실명 전 소녀의 순수함부터 고통과 원망 등 한을 딛고 어떤 경지에 오른 소리꾼의 품격까지 극과 극을 오가는 인물의 감정을 다른 소리의 결로 단단하게 소화해낸다.

기존 ‘서편제’ 공연과 다른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은 네 인물의 감정이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 판소리 다섯 마당의 하이라이트인 눈대목을 통해 표현된다는 점이다.

일테면 ‘심청가’ 중 심봉사가 눈뜨는 대목을 아비와 소녀가 분창한 뒤 아비가 소녀의 눈에 청강수를 부어 눈을 멀게 하는 식이다. 아비의 욕망에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나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실명한 소녀의 처지가 그야말로 닮은 꼴이다.

이어 실명한 소녀의 절망은 ‘흥보가’ 중 흥보가 제비 새끼의 다리를 고쳐주는 대목과 겹치고, ‘춘향가’중 몽룡과 춘향이 이별주를 나누는 대목은 병으로 세상을 뜨게 된 아비와 소녀의 이별로 표현되며 판소리 다섯마당의 눈대목이 다채롭게 재해석된다.

‘서편제’는 또 한(恨)을 ‘마음속의 실타래’로 표현한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의 실타래가 있으니, 소녀가 자신에게 닥친 재난을 극복하고 소리꾼으로 더 단단해지는 모습은 봄의 들판에 피는 냉이처럼 고단하지만 꺾이지 않은 생명력으로 치환된다. 다만 2막이 이복 오빠의 한풀이로 확장되면서 소녀의 절망과 원망, 자기극복의 감정이 좀 더 치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든다.

돌고도는 원형 무대처럼, 소녀는 지팡이를 짚고 걷고 또 걷는다. 마지막 '아마도 사랑이야'는 이번 공연을 위해 새롭게 작곡한 곡이다. 소녀에게 아비는 원망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소리를 가르쳐준 스승이다. 전국 팔도를 돌아다닌 세 가족은 소리를 하는 기쁨에 푹 빠진 순간도 있을 것이다. 동명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떠오르는 이 공연의 엔딩은 마치 축제처럼 즐겁게 표현했다.


한편 정동극장 1열에 대한 관객의 불만은 귀기울여볼만하다. 무대가 너무 높아 목이 아팠다는 반응이 그것이다. 또 인물의 감정에 깊이 몰입해야 하는 내용의 특성상, 어떤 관객은 마당극을 즐기듯 극 내용과 무관하게 수시로 추임새를 넣는 다른 관객의 행동에 불편함을 표하기도 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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