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경제의 곤경, 타산지석 삼아야

파이낸셜뉴스       2025.11.12 18:34   수정 : 2025.11.12 19:12기사원문
한때 우리의 롤모델 독일 경제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 우려
탈원전 후 러시아 가스에 의존
제조업 무너뜨리는 화근 불러
전력수요 폭주 AI 혁명 앞두고
독일 실책이 우리의 반면교사

영국·프랑스·독일 등 서유럽 선진 3개국 경제가 요즘 휘청거리고 있다. 긴 불황의 터널에 갇히면서다. 특히 '유럽의 경제 기관차'였던 독일이 속된 말로 죽을 쑤고 있다.

올해 3·4분기 경제성장률이 전 분기 대비 0.0%로 집계됐다. 미국발 관세 여파로 이대로 가면 자칫 2023, 2024년에 이어 3년 연속 역성장을 기록할 판이다.

세계 3위 경제대국 독일이 '마이너스 성장의 덫'에 걸린 건 우리에게도 놀라운 소식이다. 독일은 여러모로 한국의 '역할(롤) 모델' 국가였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패전의 잿더미 위에서 동·서독으로 분단됐지만 '라인 강의 기적'을 꽃피운 서독이었다. 우리도 이를 벤치마킹해 6·25전쟁의 참화를 딛고 1960~70년대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 독일은 '제조업 강국'으로서도 우리의 본보기였지만, 같은 분단국으로서 먼저 통일을 이룬 점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랬던 독일이 이제 '유럽의 병자'로 전락한 인상마저 든다. 이는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남긴 부정적 유산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16년간(2005~2021년) 집권한 메르켈은 퇴임 때까지도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의 '무티(Mutti·엄마) 리더십'은 신뢰와 통합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재임 후반기 그의 몇 가지 잘못된 선택이 작금의 독일의 곤경을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탈원전에 따른 에너지 안보 실패, 빅테크·반도체 산업 육성에 소홀, 중국 시장에 과도한 의존 등이 주요 실책 목록이다.

러시아의 값싼 천연가스에 '올인'한 건 최대 악수였다. 메르켈은 미국과 동유럽이 극력 반대했던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 건설을 강행했다. 탈원전으로 에너지가 태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역풍을 제대로 맞았다. 우선 전기료 상승으로 독일 제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메르켈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호전성을 우려하는 동유럽국가들의 원성을 샀다. 가스관 건설을 고집해 러시아가 전쟁 비용을 댈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최근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전 총리가 메르켈을 "유럽에서 가장 해로운 정치인"이라고 비난했겠나.

메르켈이 러시아에 코를 꿴 시발점은 탈(脫)원전이었다. 물리학 박사인 그는 처음엔 원전에 긍정적이었다. 그가 이끄는 기민당이 과반 의석에 못 미쳐 연정 파트너였던 사민당·녹색당의 입김을 받으면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탈원전에 체중을 확 실었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전제했지만, 무리수였다. 아직도 원전 강국인 프랑스와 수력발전량이 많은 스위스로부터 모자라는 전기를 사서 쓰는 처지니….

독일은 메르켈 퇴임 이후에도 풍력·태양광 진흥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들 재생에너지의 발전 비효율성을 러시아산 가스 발전으로 메우려다 큰 코만 다쳤다. 자동차·기계 등 독일 제조업이 전기료가 싼 중국에 덜미를 잡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유럽연합(EU) 국가 중 탄소배출 1위라는 지표도 아이러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현 총리는 탈원전 역풍의 심각성을 인식 중이다. 당장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테크 산업을 키우려 해도 에너지 부족이 걸림돌이다. 올라프 숄츠 전 총리(사민당)가 독일 내 마지막 원전 세곳까지 폐쇄한 터라, 소형모듈원자로와 핵융합 기술 등 신기술 투자로 돌파구를 찾고 있지만 갈 길은 멀어 보인다.

하긴 남의 나라를 걱정할 계제인가. 증시만 활황세일 뿐 고용 등 다른 경제지표는 저조한 건 우리와 독일이 매한가지다. 무엇보다 현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갈피를 잡지 못하니 문제다. 유럽국과 달리 '탈(脫)탈원전'에도 여전히 소극적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고리원전 2호기 재가동을 늦추고 있다. 한미 관세협상에서 정부는 '마누가(MANUGA·미국 원전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에 적극성을 띠지 않았다.

이재명 정부도 독일 메르츠 정권처럼 'AI 시대' 개막을 부르짖고는 있다. 이 대통령은 며칠 전 국회 시정연설에서 "내년 AI 분야 예산으로 10조1000억원을 편성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런 다짐이 공허하게 들린다. 내년 AI 예산이 올해에만 13조원에 달했던 민생 쿠폰 재원 등 '이재명표' 포퓰리즘 예산보다 적어서만이 아니다. AI 혁명에 필수불가결한 전력 확보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
' 오래 회자된 국내 가전업체의 광고 카피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독일을 이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판이다. 독일의 에너지 안보 실패를 거울삼아 적어도 10년을 내다보며 에너지 수급 로드맵을 짤 때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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