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화·철강 필요한건 마중물 아닌 진두지휘

파이낸셜뉴스       2025.11.23 19:29   수정 : 2025.11.23 19:29기사원문

지난 2009년 9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 미국 '철강도시(Steel City)' 피츠버그.

US스틸 본사 인근 주택가를 걷다 느꼈던 그 '스산함'은 지금도 선명하다. 잡초가 무성한 골목, 깨진 유리창, 주인 잃은 빈 의자들. 활기를 잃은 풍경은 세계 제조업 중심지였던 미국 북동부가 러스트벨트(rust belt)로 쇠락해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줬다. 당시 피츠버그에서는 또다시 US스틸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었다.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부품. 한때 대한민국을 떠받쳤던 제조업 현장을 다시 들여다보겠다는 건 오래 덮어둔 일기장을 펼치는 기분과도 같았다. 곳곳에 '한국판 러스트벨트'가 생겨난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달 초 포항·여수·군산을 취재한 기자들이 들려준 현장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무거웠다.

중국산 저가 공세, 미국발 관세 압박, 내수 침체까지 겹치면서 지방 공업도시들은 '소멸 위기'라는 말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 이미 소멸을 맞는 중이었다.

특히 '철강의 도시' 포항과 '석유화학의 도시' 여수의 상흔은 깊었다.

포항철강산업단지에는 빈 트럭이 넘쳐났다. 한 트럭 기사는 "전에는 주말이란 게 없었는데, 이제는 한 달에 일하는 날이 14일도 안 된다. 기름값·유지비 제하면 100만원 남짓 남는다"고 했다. 화물차 할부금을 못 갚아 중고차로 내놓는 기사도 늘고 있다고 했다. 일자리가 사라지니 젊은 층이 떠나는 건 당연했다. 30년 가까이 50만명을 지켜온 포항 인구는 2022년 '50만 붕괴'를 기록한 뒤 현재 48만명대로 내려앉았다.

여수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여수에서 만난 김도현 플랜트건설노조 여수지부 기획국장은 "지난해 월평균 9000명 수준이던 조합원이 지금 여수에 남은 인력은 3000명대"라며 "나머지는 울산·대산 등으로 이동하거나 아예 업종을 바꿨다"고 전했다.

군산은 7년 전 문을 닫은 '한국GM 군산공장'의 트라우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군산 제조업의 심장'이던 공장이 멈춘 뒤 인구는 2만명 가까이 줄었다. 제조업 부가가치 생산액은 아직도 2017년, 한국GM 철수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은 심각해지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자율적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뒤에 서 있다. 과거처럼 몇 년 버티면 좋아지는 순환적 위기가 아니라는 점은 전문가들도 한목소리로 말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구조조정을 직접 손대는 대신 지원법안만 줄줄이 내놓고 있다. 철강·석유화학 산업을 위한 K-스틸법과 석유화학 산업지원법안이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지만, 정작 실효성을 담보할 구체적인 대책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석유화학 지원법은 당초 포함됐던 전기요금 감면·보조 조항이 논의 과정에서 빠졌다. 산업용 전기요금이 미국·중국 대비 높은 상황에서 경쟁력 저하는 불 보듯 뻔하다.

여기에 과도한 탄소감축 목표까지 더해졌다. 대통령 직속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가 2035년까지 온실가스를 2018년 대비 53~61% 감축하겠다는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초안을 내놨다. 일각에서는 배출권 구매비만 수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지원책을 내놓으면서 동시에 기업들을 압박하는 형국이다. 정밀한 컨트롤타워가 사라진 현장에서 기업들의 비명 소리는 커져간다.

미국·중국·일본조차 산업정책의 최전선에 정부가 직접 서 있다. 미국만 봐도 그렇다. 인텔 지분을 정부가 직접 매입했고, 주요 전략기업 지분 참여도 주저하지 않는다. 관세정책 역시 사실상 '산업 유치 전쟁'의 무기다. 자국 제조업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정부가 전면에 서는 것을 당연한 국가전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 정부 개입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봤던 인식을 정부부터 바꿔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마중물'이 아니다. 정부의 본격적인 '진두지휘'다.

courage@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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