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감 넘치는 마법적 무대예술…태평양 한복판으로 초대한 '라이프 오브 파이'
파이낸셜뉴스
2025.12.08 18:16
수정 : 2025.12.08 18:16기사원문
‘라이프 오브 파이’ 2일 한국 초연 개막
[파이낸셜뉴스] “상상조차 어려운 고난에 직면한 이의 용기와 인내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 공연 도록 첫 장에 적힌 이 소개 문장은 ‘라이프 오브 파이’가 품은 핵심 정서를 명확히 드러낸다. 도서와 영화로 먼저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이야기가 ‘라이브 온 스테이지’라는 수식어와 함께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GS아트센터에서 국내 첫선을 보였다.
비영어권 언어로는 최초로 제작된 한국어 프로덕션 '라이프 오브 파이'는 2019년 영국 웨스트엔드 초연 이후 올리비에상 5관왕, 미국 토니상 3관왕을 거머쥔 화제작답게, 공연만의 창의성과 상상력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무대예술을 선보였다.
제작사 에스앤코 신동원 PD는 앞서 “과연 ‘이 이야기가 무대에서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품었다가 살아 움직이는 벵골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눈과 마주친 순간 공연화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작품은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팀의 혁신적 기술과 상상력이 집약된 결과물로, 무대가 가진 물리적 제약을 퍼펫·영상·조명·음향˙음악의 조화로 돌파한다. 매 장면, 무대를 어떻게 구현했는지 구석구석을 살피고, 감탄하는 재미야말로 이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이다.
살아 움직이는 상상력, 무대 구현 보는 재미
소설 ‘파이 이야기’는 맨부커상 수상작이자 전 세계 1500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로,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소년 파이가 선박 침몰 사고 후 벵골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함께 227일 동안 태평양에서 표류하는 믿기 힘든 여정을 담았다. 공연은 병실 한가운데 놓인 침상 하나에서 시작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파이의 회상 형식으로 이야기를 펼쳐낸다. 병실은 순식간에,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과 가족의 웃음이 깃들던 동물원으로, 채식주의자이자 여러 종교를 품었던 파이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끌벅적한 시장으로,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편견이 드리워졌던 화물선과 한없이 펼쳐진 바다로 차례로 변모한다. 그 과정에서 무대는 마치 마법을 부리는 듯 시·공간의 경계를 유연하게 지워내며 관객을 파이의 기억 속 여정으로 이끈다.
여기에 올리비에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퍼펫 리처드 파커를 비롯해 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염소 등 난파선 목재로 만든 듯한 동물 퍼펫이 실제 생명체처럼 움직인다. 아기 오랑우탄의 재롱엔 미소가 절로 나오고, 리처드 파커의 ‘식사’가 되는 염소 장면에선 약육강식의 세계가 절절히 다가온다. 그렇게 동물원 맹수의 위엄과 잔혹함을, 작은 새와 물고기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묘사한다.
전원 한국 배우들로 구성된 퍼펫티어(조종자)들은 스스로를 숨기지 않고 무대 위에서 존재를 드러낸 채 동물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무대미술과 퍼펫 연기, 그리고 주조연 배우들의 감정 표현이 정교하게 어우러져, 이질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퍼펫티어의 존재는 무대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오랜만에 경험하는 아날로그적 예술의 묘미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여기에 디지털 영상기술이 더해지며 몰입감을 더한다. 시공간에 따라 벽에는 숲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천장에서는 폭우가, 바닥에서는 넘실거리는 파도와 반짝이는 물결이 펼쳐진다. 단순한 장면 전환 이상의 감각적 몰입을 제공한다.
파이의 두 이야기, 어느 것을 믿고 싶나요
2막에서는 파이와 리처드 파커의 본격적인 공존이 그려진다. 파이는 아버지의 충고를 떠올리며 맹수를 길들이려 애쓰고, 예상치 못한 둘의 ‘대화’ 장면에서는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거북이 내장을 함께 먹는 장면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둘 사이에 잠시 스며든 평화의 순간을 암시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핏빛 내장까지도 시각적으로 구현해 내며 관객의 허를 찌른다.
펼쳐지는 밤하늘의 별빛은 영화에서 느꼈던 자연의 경이로움을 그대로 무대 위에 옮겨온 듯하다. 여전히 전쟁 중인 지구촌을 떠올리며, 파이와 리처드 파커처럼 공존의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라는 생각도 든다.
2016년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무대로 복귀한 박정민의 존재는 반갑다. 다만 원작 공연 대비 파이 역 박정민의 체격이 큰 편이라 리처드 파커의 위협감이 다소 약해 보인다는 아쉬움은 있다. 드라마와 스크린 위주로 활동해 기존 무대 배우와 발성법도 다르나, 전체 서사를 끌어가는 주역으로선 존재감이 충만하다. 무엇보다 최근 가수 화사와의 퍼포먼스로 인기가 급상승해 박정민 출연 회차는 이미 매진된 상태라 2회차 티켓 오픈을 노려야 한다.
원작 소설이 가진 철학적 깊이를 모두 담아내기엔 무대예술의 제약이 있지만, 핵심 주제인 ‘이야기의 힘’과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믿는가’라는 질문은 무대 위에서도 충분히 살아있다. 공연 마지막, 파이가 들려주는 두 이야기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결국 관객의 몫이나,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맥스 웹스터 연출은 제작사를 통해 이 작품에 대해 "협력에 관한 작품"이라며 "예술가와 관객, 스토리털러들과 관객들 그리고 극장의 현실과 상상력의 무한한 세계가 서로 맞닿는 협력"이라고 말했다. "파이의 이야기를 한국어로 듣고, 한국의 문화 속에 자리 잡는 것을 느끼며, 한국의 아티스트들을 통해 전해진다는 것은 이 작품의 여정에 함께 해온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영광이자 하나의 이정표"라며 비영어권 최초 한국어 초연의 의미를 짚었다. 내년 3월2일까지 GS아트센터.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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