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형 퇴직연금, 새로운 발판 되려면

파이낸셜뉴스       2025.12.08 18:14   수정 : 2025.12.08 18:14기사원문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는 태양신 아폴론에게 구애를 받으며 미래를 정확히 예언하는 능력을 받는다. 하지만 결혼을 거절하자 누구도 그 예언을 믿지 않게 되는 저주에 걸린다.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카산드라는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고 외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고 트로이는 목마로 인해 멸망한다.

카산드라 얘기는 타당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는 사례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된다.

최근 주식시장 전반의 호황으로 적극적 투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이에 노후소득 보장체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퇴직연금의 수익률 제고를 위해 기금형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힘을 받고 있다. 기금형을 도입해 430조원의 퇴직연금 적립금이 국내 증시 부양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하지만 기금형이 퇴직연금의 새로운 승리를 가져올 지, 트로이의 목마처럼 시련의 원인이 될 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금형 논의에서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무시되는 원칙이 있다. 바로 '높은 수익에는 높은 위험이 따른다'는 것이다. 기금형을 도입하면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고 하지만 그에 따르는 위험은 외면하고 있다. 최근의 통계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증시가 호황이던 2023년 실적배당형의 수익률은 13.27%로, 원리금보장형(4.08%)의 3배에 달했다. 하지만 2022년의 경우 원리금보장형은 1.83%, 실적배당형은 -14.2%였다. 변동성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기금형을 통한 적극적 투자가 유일한 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이다.

기금형 도입시 통합 운용으로 규모의 경제를 형성하고, 전문성이 뒷받침돼 수익률이 올라간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퇴직연금은 은퇴 후 인생을 위한 종잣돈인 만큼 안정적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이 국민 다수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논의 과정에서 '하이리스크-하이리턴' 원칙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 특히 근로자나 사용자가 아닌, 제3자가 운용지시를 내리는 기금형은 손실 발생시 책임 소재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기금형을 도입하더라도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확정급여형(DC)에 우선 도입하는 방향을 고려할 수 있다. 확정급여형(DB)은 근로자가 받을 퇴직급여가 사전에 정해져 있어 수익률 제고를 통한 근로자 편익 증가가 없다. 오히려 금융 위기나 사고 등으로 기금 파산시 수급권이 위협받을 수 있다. DB를 선택하는 근로자도 안정적인 퇴직급여 수급을 중시하고, 사용자 역시 퇴직연금 지급을 넘어선 수익률 제고 유인이 적다. 특히 지급보증기구와 같은 수급권 보호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DB에 기금형 도입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해외 기금형 성공사례인 영국과 호주 모두 DC를 기반으로 하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역대급 불장'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 증시의 재평가·활성화는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근로자의 노후를 지탱하는 퇴직연금이 증시 활성화의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이 돼서는 안 된다.
카산드라의 예언은 정확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비극이 됐다. 기금화를 향한 우려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국민의 노후생활 안정이라는 퇴직연금의 본래 목적을 지키는 발전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주선 강남대 법행정세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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