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예수정 "욕해도 좋아요, 연극 '태풍'은 '유기농 맛'이죠"

연극 '태풍'에서 주연으로 출연 중인 예수정(국립극단 제공)

'태풍' 공연사진. 오른쪽이 배우 예수정.(국립극단 제공)

배우 예수정이/뉴스1 ⓒ News1 권현진 기자

'태풍' 공연 중인 예수정(국립극단 제공)

(서울=뉴스1) 정수영 기자

"'어휴, 뭐 이런 작품이 있어?' 욕해도 좋아요. 모두가 좋아한다면 오히려 그 연극은 망친 거예요. 그건 인스턴트 라면 끓인 거죠. '태풍'은 노선을 정했어요, '유기농'으로요."

배우 예수정(70)은 "작품 욕하는 건 흔한 일"이라며 "관객의 생각은 자유"라고 한 치 망설임 없이 말했다. 연극 '태풍'이 포용성이 두드러져 인물 간 긴장감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다소 밋밋하게 느껴진다는 일부 평가에 대한 답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연극 속 수많은 단어 중 하나라도 관객 마음에 남아 인생의 어느 순간에 불현듯 떠오른다면, 그걸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예수정은 지난 4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태풍'의 주연을 맡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 동생에게 권좌를 빼앗기고 딸과 함께 망망대해로 쫓겨난 밀라노 공작이 외딴섬에서 12년간 마법을 익히며 복수를 준비하지만, 결국 용서를 택한다는 이야기다.

출연 계기를 묻자 "운 좋게 캐스팅된 것 같다"며 웃었다. 이어 "셰익스피어 작품을 누가 마다하겠나. 번역된 문장이라도 단어 하나하나가 보석 같다"며 "거기에 70년 전통의 명동예술극장까지, 안 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여성성 근본은 '깊은 이해'·신비로움·단호함"

이번 작품은 셰익스피어 특유의 시적인 대사들을 살리면서도 주요 인물의 성별을 바꿔 새롭게 접근했다. 대표적으로 주인공인 밀라노 공작 '프로스페로'를 여성인 '프로스페라'로 바꿨다.

"여성성의 근본은 깊은 이해예요. 그래서 부드러움이 나오는 거고요. 또 여성은 몸에 생명체를 품을 수 있는 신비로움과, 단호함도 있지요. 그러니 성별을 바꾼 게 무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셰익스피어가 지금 시대에 살았다면 틀림없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썼을 거예요.(웃음)"

작품이 던지는 중요한 화두는 '용서'. 그는 프로스페라의 용서를 "한국적 정서"와 연결 지었다. "한국 사람들은 부모·형제 같은 혈연관계에 대한 끈끈함이 있다"며 "한국은 별별 욕을 해도 결정적인 순간엔 결국 피의 정서가 작동하는 나라다, 프로스페라가 동생을 용서하는 건 한국이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외국이라면 이 정서를 따라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프로스페라처럼 용서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예수정은 용서 못 하죠. 저라면 '외면'이에요. 작품을 하면서 '예수정, 너는 인간도 아니구나' 싶을 때가 있어요. 씁쓸하죠. 그런데 그런 생각이라도 하게 되는 게 어디예요. 프로스페라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할 뿐이죠. 감사한 일이에요."

데뷔 46년…"연기에는 대가(大家) 없어"

예수정은 올해 데뷔 46년 차다. 1973년 대학교 1학년 때 영화 '대부'의 말론 브랜도를 보고 배우의 꿈을 품었다. 그리고 6년 뒤 연극 '고독이라는 이름의 여자'로 데뷔하며 연기의 세계에 들어섰다. 이후 연극·영화·드라마를 종횡무진하며 연기에 대한 열정을 이어왔다. 올해만 해도 영화' 사람과 고기', 드라마 '우리 영화' '폭군의 셰프' '트웰브',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고트' 등에 출연했다.

왕성한 활동의 원동력을 묻자, "재미"란 답이 돌아왔다. "새로운 작품, 새 인물을 만날 때 너무 흥미로워서 고단하지가 않아요. 물론 스트레스가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걸 넘어설 만큼 즐겁고 재밌어요."

이어 예수정은 새 작품을 만나면 늘 맨땅에서 시작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작품마다 속도·리듬·띄어 읽기 등 문장이 다 달라서 아야어여를 처음 배우는 기분이 든다"며 "연기에는 대가(大家)가 없다, 저는 여전히 '연기 초짜'"라며 자세를 낮췄다.

여러 장르 가운데 연극의 장점은 배우에게 '들여다봄'의 기회를 준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는 "'태풍'을 준비하면서는 '프로스페라의 12년'을 깊이 들여다봤다"며 "그 시간이 없었다면 프로스페라는 절대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 시간을 생각하는 건 절대 가볍지 않았지만, 제겐 좋은 시간이었다"며 "'나'라는 몹쓸 인간을 들여다보게 해준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배우가 좋은 작품을 만나는 건 감사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새해 계획을 묻자 "오는 28일까지 '태풍'을 하고, 29일부터는 바로 드라마 연습을 시작한다"고 했다. 새해에는 드라마 출연이 제법 있을 것 같다고 귀띔했다. 그러니 내년에도 이 관록의 배우는 여전히 '초짜'의 마음으로 다시 출발선에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