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이해하더라도 ‘구조’는 검증돼야

파이낸셜뉴스       2025.12.22 18:42   수정 : 2025.12.22 20:31기사원문
‘고려아연 美 투자’ 바라보며



최근 고려아연은 'Project Crucible'이라 명명된 미국 테네시 통합제련소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약 74억 달러 규모의 초대형 프로젝트로, 미국 정부 중심의 'Crucible JV LLC'를 대상으로 19억 달러 규모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단행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47억 달러의 차입과 보조금을 더해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복안이다.

이 소식을 접하며 '한·미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읽었다. 핵심광물과 방산 소재 공급망을 동맹 내부로 끌어들이려는 미국의 정책과, 현지 생산기지를 통해 시장 접근성을 높이려는 한국 기업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다. 그 '명분'만큼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상장회사의 의사결정에서 명분은 출발점일 뿐이다. 특히 경영권 분쟁 국면에서는 두 가지 질문이 더 엄격하게 뒤따라야 한다. 첫째, 거래가 회사 가치에 유리한가? 둘째, 의사결정 과정이 공정하고 투명한가? 이 질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자금조달은 자칫 '의결권 조달'로 비칠 수 있다.

먼저 숫자를 보자. 이번 유상증자로 Crucible JV LLC는 고려아연 지분 약 10.59%를 확보하게 된다. 경영권 분쟁 중인 상황에서 10%는 단순한 숫자가 아닌 '캐스팅보트'다. 증자 후 영풍·MBK 측 지분은 40% 수준으로 희석되는 반면, 최윤범 회장 측은 우호지분을 합산해 39% 수준으로 뛰어오른다. 돈을 받는 대신 표를 얻는, 전형적인 '백기사' 구조인 셈이다. 특히 납입일이 주주명부 폐쇄일 직전인 12월 26일이라는 점은 의구심을 더한다. 연말 주주명부에 이름을 올려 내년 주총 표 대결에 활용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계약의 세부 내용도 짚어봐야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고려아연은 미국 전쟁부에 운영 주체인 자회사의 지분을 헐값에 살 수 있는 권리(워런트)를 부여하는 등 불평등한 계약을 맺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기업가치 희석과 직결되는 중대한 정보다. 투자자가 판단할 필수 정보가 공시로 확인되지 않는다면, 감독당국은 신속히 정정공시 명령을 내려야 한다.

또한 8조 원대에 달하는 포괄적 채무보증 규모도 우려스럽다. 이는 고려아연 자기자본을 상회하는 수준이다. 프로젝트 파이낸싱의 위험이 미국 법인을 넘어 한국 본사의 숫자로 전이되는 구조다. 평상시에는 주석상의 우발채무이지만, 위기 시에는 대차대조표를 뒤흔들 실체로 변한다.

필자는 미국 투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명분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고려아연은 경영권 분쟁이 없었더라도 이 시점에, 이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했을 것인지를 증명해야 한다. 왜 주주배정이 아니었는지, 왜 이 조건이 최선이었는지를 숫자로 제시해야 한다. 이사 지명권, 보증 범위, 트리거 조항 등 핵심 조건의 '완전 공시'가 선행되어야 한다.

임방진 대주 회계법인 회계사 겸 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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