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억 믿고 명퇴했는데, 밥값도 무서워요"...건보료만 월40만원, 50대 은퇴라는 '사치'

파이낸셜뉴스       2026.02.07 08:30   수정 : 2026.02.07 13:37기사원문
은퇴 후 가계부의 배신 '덜 쓰는데 잔고는 더 빨리 비는 이상한 현실'





[파이낸셜뉴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 아낀다고 아끼는데 나가는 돈은 그대로다. 아니, 오히려 더 많아진 것 같다.

버는 돈은 없는데 나갈 돈만 줄을 선 것 같다.”


강준석(57·가명)씨는 지난해 9월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25년 동안 쉼 없이 일한 만큼 ‘당분간 쉬면서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이었다. 퇴직금과 그동안 모아둔 투자자산을 합치니 7억원 남짓. 국민연금이 나오기 전까지의 ‘소득 공백기(데드 브릿지)’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아껴 쓰면 충분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은퇴 후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불안감이 커졌다. 통장 잔액이 줄어드는 속도가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강 씨는 “은퇴하면 소비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줄 알았다”며 “그런데 막상 은퇴하고 보니 나가는 돈이 더 많아졌다”고 토로했다.

부담되는 지출 1순위로 떠오른 ‘식비'




통계를 보면 은퇴를 앞둔 50대의 소비 구조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특히 식료품(식비) 증가가 두드러진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50대 가구의 연간 소비지출은 2016년 2936만원에서 2024년 3964만원으로 8년 새 35% 증가했다. 같은 기간 식료품(식비) 지출은 773만원에서 1251만원으로 61.8% 급증했다. 전체 소비 증가율의 두 배에 가깝다.

주거비는 29.8% 늘었고, 의료비는 22.6% 증가했다. 반면 통신비는 오히려 2.7% 줄었다. ‘줄일 수 있는 지출’은 이미 줄인 상태에서, 줄이기 어려운 생활비가 빠르게 불어난 셈이다.

연령대별로 봐도 비슷한 흐름이다. 2016년 대비 2024년 소비지출 증가율은 30대(21.0%)보다 50대(35.0%), 60대(53.7%)에서 더 가파르다. 은퇴 이후에도 소비는 줄지 않고 오히려 생활비 성격의 지출이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소비가 구조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는 무작정 줄이거나, 반대로 ‘써도 된다’고 합리화하는 접근 모두 위험하다”며 “지출의 성격부터 다시 나누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런 구조적 변화 위에 은퇴 직후의 심리 변화가 겹치면서, 소비는 더 빠르게 튀어 오르기도 한다.

"고생한 나를 위해, 이쯤은" 또 하나의 신혼기간, ‘은퇴 허니문’


은퇴 직후 1~3년은 그동안 고생한 자신에게 보상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강해지는 시기다. '이 정도는 써도 되겠지', '평생 일했는데 이 정도는 누려야지'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해외여행, 자동차 업그레이드 등으로 이어진다.

강 씨 역시 은퇴 후 해외여행 한 번, 국내여행 두 번, 오래 미뤄둔 주방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비용은 3000만원이 넘었다. 강 씨는 “한 번쯤은 괜찮겠지 싶은 것들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사실 특별히 사치한 소비는 아니었다. 직장에 다니며 시간과 여유가 없어 미뤄왔던 일들이었다.

이 시기를 심리학·노후설계 현장에서는 ‘허니문 단계’라고 부른다. 은퇴를 설명할 때 공식 통계 용어는 아니지만, 은퇴 직후 1~3년(길게는 5년) 동안 나타나는 심리·행동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인다. 결혼 직후 신혼여행을 가고 평소보다 지출이 늘어나는 것처럼, 은퇴 직후에도 자유와 해방감이 소비 증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허니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제는 이 시기의 소비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때 한 단계 올라간 지출 수준이 이후 생활비의 기준값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 번만’의 대가…복리로 사라지는 자산


허니문 단계의 진짜 위험은 금액이다. 수천만 원 단위의 목돈이 한 번에 빠져나가면, 그 돈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간까지 함께 사라진다.

강 씨는 7억원이라는 자산을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뭉칫돈’으로만 인식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자산의 크기보다 현금흐름(Cash Flow)에 집중하라고 조언한다.

김경필 머니트레이너 대표는 “은퇴 이후 자산을 뭉칫돈으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노후 설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후의 핵심은 자산 규모가 아니라 잉여소득이 만들어지는 구조”라며 “3000만원은 단순한 소비 여력이 아니라, 20년 동안 매달 현금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작은 연금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3000만원을 연 4% 수익률로 운용하면 매달 약 10만원의 현금흐름이 발생한다. 허니문 단계에서 이 돈을 써버린다면, 단순히 3000만원을 쓰는 것이 아니라 노후 20년 동안 매달 들어올 수 있었던 ‘10만원짜리 연금을 영구히 삭제하는 것과 같다. 은퇴 초반의 ‘한 번만’ 지출이 노후 후반부의 생존 비용을 미리 가불해 쓰는 셈이다.

시간이 돈이 되는 역설…‘심심함의 비용’


은퇴 후에는 출퇴근 비용이 줄어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넘치는 시간’을 처리하기 위한 비용이 그 자리를 채운다. 직장인은 돈을 쓰기 위해 시간을 내지만, 은퇴자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돈을 쓴다. 아침 늦게 일어나 외식이 늘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취미 활동을 시작한다. 하루 1만~2만원의 소소한 지출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한 달이면 30만~50만원이 된다.

59세 은퇴자 박진호씨는 “직장 다닐 때는 점심값으로 월 20만원 정도 썼는데, 은퇴하고 나니 브런치 한 번에 2만원씩 나간다”며 “결국 식비가 더 늘었다”고 말했다. 이 돈은 사치비가 아니라 시간을 처리하기 위한 생활비가 되기 때문에 줄이기도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은퇴 후 지출이 늘어나는 이유는 소비 성향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하루를 채워주던 ‘회사’라는 장치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예상 외 지출, ‘건보료 습격’


은퇴자들이 가장 당황하는 지출 항목은 건강보험료다. 직장가입자에서 지역가입자로 전환되는 순간, 보험료 산정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역가입자 보험료는 소득뿐 아니라 주택·토지 같은 재산, 자동차 보유 여부까지 점수로 환산해 부과된다. 수도권에 아파트 한 채를 보유한 은퇴자의 경우 소득이 많지 않아도 월 수십만 원의 보험료가 책정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공시가격 6억원 안팎의 아파트와 국민연금·금융소득이 있는 경우, 직장 시절보다 보험료가 두세 배 뛰어 연간 400만~500만원을 부담하기도 한다.

자녀의 피부양자로 전환하는 것도 쉽지 않다.

공적연금과 이자·배당을 합친 연 소득이 2000만원을 넘거나, 재산 기준을 초과하면 피부양자 인정이 어렵다. 전문가들은 “퇴직 전에 건보료를 미리 계산해보는 것만으로도 수백만 원의 차이가 난다”고 조언한다.

‘낀 세대’의 구조적 누수…자녀와 부모 사이


소득은 없지만 부양 책임은 여전한 ‘신노년’의 현실도 통장을 빠르게 비우는 요인이다. 자녀 결혼 지원으로 끝날 줄 알았던 부담은 전세 보증금 보충, 손주 돌봄 비용 등으로 이어진다. 작은 지원이 반복되며 상시 지출로 굳어진다.

여기에 80~90대 부모의 장기 요양 비용까지 더해지면 상황은 더 어려워진다. 요양병원비나 간병비는 몇 달로 끝나지 않는다. 50~60대 은퇴자가 자신의 노후 자금을 헐어 부모를 부양하는 ‘노노(老老) 부양’은 이제 예외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진짜 원인…‘기간을 착각한다’


많은 은퇴자는 노후 자금을 75~80세까지만 계산한다. 그러나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65세의 기대여명은 남성 18.6년, 여성 22.8년이다. 은퇴 이후에도 평균 20~25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긴 기간의 초반 5년에 자산이 크게 줄어들면, 이후는 회복이 아니라 버티는 시간이 된다.

김경필 대표는 “노후 불안의 핵심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야 할 시간이 너무 길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며 “오래 사는 시대에는 수익률보다 생활력과 생존력, 즉 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태도가 더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무조건 아끼는 게 답은 아니다”…소비의 재설계


단 무조건 아끼는 게 답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은퇴 후 절약을 ‘줄일 소비를 찾는 일’이 아니라 끝까지 가져갈 소비를 선별하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배움에 쓰는 돈은 투자: 디지털 기술, 새로운 자격, 기술 학습은 취미를 넘어 부업이나 재취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경험에 쓰는 돈은 활력소: 여행·공연 같은 경험 소비는 우울감을 낮추고 관계를 유지하게 한다. 다만 과시적 소비보다는 ‘가성비 있는 즐김’이 중요하다.

△건강과 관계에 쓰는 돈은 미래 보험: 운동, 검진, 친구와의 식사는 장기적으로 의료비와 고립 비용을 줄인다.

전문가들은 “은퇴 후 지출을 무조건 줄이려는 사람과 전략적으로 재배치하는 사람의 10년 후 삶의 질은 확연히 다르다”며 “의미 없는 고정비는 과감히 줄이고, 건강과 관계, 배움에는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필요한 건 ‘기록’과 ‘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은퇴 직후 최소 6개월에서 1년은 줄이기보다 관찰이 우선이라고 조언한다. 어디서 돈이 새는지 정확히 기록하지 않으면, 무엇을 줄여야 할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행·리모델링 같은 큰 지출은 생활비와 분리해 관리하고, 통신비·보험료·구독료 같은 자동 지출부터 점검해야 한다. 은퇴 전 월 300만원을 쓰던 가계라면, 은퇴 직후에는 250만원 이하로 내려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다.

은퇴 후 첫 5년의 절약은 구차하게 사는 일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품위를 지키기 위한 방어벽을 쌓는 과정이다.통장 잔액이 예상보다 빠르게 줄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설계에 구멍이 났다는 신호다.

은퇴 후 절약의 목적은 통장을 불리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살기 위해 쓸 수 있는 여유를 만드는 데 있다.

'은퇴=퇴장'이라는 낡은 공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평균수명 83세 시대, X세대가 본격적인 은퇴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은퇴 개념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담은 [은퇴자 X의 설계]가 매주 토요일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kkskim@fnnews.com 김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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