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흥청(興淸) 때문에 결국 흥청망청(興淸亡淸)했다

파이낸셜뉴스       2026.02.07 06:00   수정 : 2026.02.07 06:0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주>



조선의 왕 연산군은 세자 시절 어린 나이에 모친이 폐위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미의 죽음의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성장했고, 즉위를 하고 나서야 “어머니는 억울하게 죽었다.

” 혹은 “신하들이 이를 숨겼다.”라는 것을 알고서는 점차 포악해졌다. 연산군은 요즘으로 보면 분노조절장애와 화병을 앓게 된 것이다.

연산군은 억눌린 분노와 상실감을 쾌락으로 잊고자 했다. 그래서 술과 음악, 가무와 여색을 가까이했고, 그러한 말초적인 자극들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잠시 잊게 해 주는 가장 빠른 수단이었다.

연산군은 밤마다 연회를 열고, 미녀들과 가무에 몰두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흥청(興淸)이란 궁중의 기녀들이었다.

연산군은 기녀들을 상중하로 등급을 매겨서 훌륭한 기녀들은 흥청(興淸)이라고 부르고, 그 아래 단계로 운평(運平)과 광희(廣熙)를 두었다. 흥청(興淸)으로 적합하지 않으면 운평(運平)으로 내렸고, 만약 흥청이 죄를 범하면 외딴 장소에 가두어 두었다가 과실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치면 다시 흥청으로 불러들였다.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소위 흥청(興淸)이란 간사하고 더러운 기운을 깨끗이 씻으라는 뜻이요, 운평(運平)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으로 지은 것인데, 어떠한가?”라고 묻자, 승지들은 이구동성으로 “칭호가 매우 아름답습니다.”라고 아부성 답을 했다. 흥청 때문에 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

연산군은 흥청(興淸)은 3백 명으로 하고, 운평(運平)은 7백 명을 정원으로 하고, 광희(廣熙)도 수를 늘리도록 했다. 그러나 지방에 있던 운평들은 이미 여러 차례 뽑혀 올라와서, 이제는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전국 각지로 사자(使者)를 보내서 여인들을 골라서 데려오도록 했다. 당시 기녀들을 홍녀(紅女)라고 했기 때문에 이들을 채홍사(採紅使)라고 불렀다. 동시에 좋은 말인 준마(駿馬)도 뽑아 올려서 채홍준사(採紅駿使)라고도 했다.

한번은 채홍준사 이계동이 전라도에서 미녀 63인과 양마 150필을 바쳤다. 연산군은 크게 기뻐하여 그들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술잔을 돌리게 하고, 특별히 노비 10명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이계동이 전라도에서 한 일은 선발이 아니라 강제에 가까웠다. 미녀들은 사실상 납치되다시피 끌려왔고, 양마 역시 주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빼앗기듯 동원되었다. 어명이란 이름을 앞세웠을 뿐, 그 행태는 백성의 재물과 사람을 수탈하던 탐관오리와 다르지 않았다.

채홍사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지방의 미녀들을 뽑았다. 연산군은 자색(姿色)이 있고 음률(音律)을 알고 호기(豪氣)가 있는, 이 세 가지를 겸한 자를 뽑아오라고 명했지만, 그 모든 조건을 갖춘 미녀들은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건에 부합하지 못했더라도 무작정 뽑아서 궁으로 데려왔다. 그래서 실제로 시녀 및 공천(公賤, 공공기관의 천민)과 사천(私賤, 개인의 천민)과 양가(良家)의 딸까지 널리 뽑아 들였는데, 그 수효가 거의 만 명에 이르렀다. 어느 집안은 궁녀가 된다는 희망이 있기도 했지만, 어느 집안은 기생으로 뽑혀가는 것이라고 슬퍼했다.

연산군은 기녀들에게 호기(豪氣)를 강조했다. 그래서 내연을 할 때 지나치게 공손해서도 안되며, 예의는 합당하되 비록 왕과 같은 지존(至尊) 앞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군색하지 않게 사리에 맞도록 그 기운을 쫙 펴야 된다고 강조했다. 기녀들은 그 수도 많았기에 흥청의 기세는 대단했다. 심지어 연산군 앞에서는 대신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었다.

신하들은 “기녀들 때문에 궁의 예가 무너지고 있사옵니다.” 혹은 “궁의 많은 기녀들 때문에 나라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있사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연산군은 웃으면서 “예란 본래 알맞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존 앞이라도 기운은 펴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라도 내 앞에서 흥청이 예의가 없다거나 옷자락이 짧네 기네 등등의 말을 삼가라.”라고 했다. 흥을 깨는 자는 연산군의 미움을 샀고, 형식을 들이대는 자는 물러나게 했다.

연산군은 연회 시 동일한 안무와 음악은 싫증을 냈기 때문에 흥청들의 화장도 더욱더 진하고 요란스러워졌다. 그래서 “흥청을 맡은 여인들의 화장이 너무 형편없으면 그들을 관리하는 관원들에게 죄를 묻겠다.”라고 명을 내리기도 했다. 그래서 연회는 화려하면서도 더욱 매혹이면서 자극적이 되어 갔다.

연산군은 자전(정희왕후 윤씨)과 대비(인수대비 한씨)를 효도로 받든다고 해서 때로는 밤중에까지 나아가 연회를 베풀었다. 자전과 대비는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왕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특히 대비는 연회가 끝난 뒤에도 마음에 즐거움이 없어 한숨을 내쉬곤 하였다.

연산군은 연회에 빠져 있으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거나 입에 담기도 힘든 기행을 일삼았다. 그는 성질이 광조(狂躁, 미친 듯이 날뜀)하여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내달려 동쪽에 있다 서쪽에 있다 하므로 가까이 모시는 나인이라도 연회 시 갑자기 사라지는 연산군이 그 행방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연회 시에는 반드시 종친의 관리자와 사대부의 아내를 입참(入參)하도록 하였는데, 연달아 밤낮으로 나오지 못하는 자가 있으므로 추문(醜聞)이 파다하였다.

연산군은 스스로 자신의 소행이 부덕함을 알고 내심 부끄러워하여 인도(仁道)를 혼란시켜 죄책감을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사대부의 친부 상(喪) 기간을 단축시켰고, 효행(孝行)이 있는 사람을 괴이하다 하여 죽였고, 형제들을 핍박하여 그 첩을 서로 간통하게 했다. 이처럼 삼강오륜은 점차 소멸되어 갔다.

대신들은 이를 방관할 뿐이었다. 신하들은 왕의 화를 두려워했고, 자신의 직책을 보전할 계책만을 도모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라는 황망(荒亡)하여 국가의 질서는 무너져 갔다.

궁에서는 “흥청(興淸) 때문에 망하게 생겼네.” 혹은 “흥청(興淸)이 아니라 망청(亡淸)이다.”라고 하면서 소곤거렸다. 궁 밖의 백성들도 어느 순간부터 “나라가 흥청망청(興淸亡淸)하는구나.”라고 하면서 입에 올렸다.

흥청망청은 요즘 흥에 겨워 돈이나 물건을 마구 쓰는 모양을 뜻하는 말로 쓰이는데, 그 어원은 이처럼 연산군이 전국에서 뽑은 최고의 기생인 흥청을 끼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결국 나라와 자신을 망하게 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연산군은 흥청에 빠졌고, 나라는 결국 흥청망청하게 되었다.

연산군은 흥청에 기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시해에 대한 복수심은 사라지지 않았고 마음 한 켠의 억울함과 분노는 여전했다. 연산군의 분노 조절장애와 화병을 약물로 다스렸다는 기록은 없다. 그 분노를 음주가무와 같은 쾌락으로 덮어두는 대신, 화병 또한 하나의 병으로 보고 다스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안타깝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연산군일기>○ 연산 10년 12월 22일. 下御書樂名, 曰興淸、曰運平、曰廣熙. 仍傳曰: "所謂興淸乃蕩滌邪穢之意也, 運平乃運際太平之意也。 其意何如?" 承旨等啓: "稱號甚美.“ (악명을 어서하여 내리기를, "흥청, 운평, 광희라 하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소위 흥청이란 사예를 깨끗이 씻으라는 뜻이요, 운평은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뜻인데, 그 의미가 어떠한가?" 하였다. 승지들이 아뢰기를, "칭호가 매우 아름답습니다." 하였다.

○ 연산 10년 12월 24일. 傳曰: "興淸樂三百、運平樂七百以爲額, 廣熙亦宜加額. (전교하기를,

"흥청악은 3백 명, 운평악은 7백 명을 정원으로 하고, 광희도 또한 증원하라."하였다.)

○ 연산 11년 6월 16일. 且外方運平, 累經採擇, 遺存者蓋寡, 今遣李季仝于全羅道, 任崇載于慶尙、忠淸道, 稱爲採紅駿使, 擇良馬、美女而來. 且假興淸樂、運平樂, 梳粧甚惡, 今後如此, 則院官員當治罪. (외방의 운평은 여러번 채택을 거쳤으므로 남아 있는 자가 거의 없으니, 이제 이계동을 전라도에, 임숭재를 경상도·충청도에 보내어 채홍준사라 칭하여 좋은 말과 아름다운 계집을 간택해 오게 하라. 또 가흥청악, 운평악의 화장이 매우 나쁘니, 앞으로도 이러하면 원의 관원을 치죄하리라.)

○ 연산 11년 8월 10일. 採紅駿體察使李季仝, 進美女六十三人, 良馬一百五十匹。 王大悅, 卽召入內殿進爵, 特賜奴婢十口. (채홍준 체찰사 이계동이 미녀 63인과 양마 1백 50필을 바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곧 내전으로 불러들여 술잔을 돌리게 하고, 특별히 노비 10구를 내렸다.)

○ 연산 12년 9월 2일. 又廣選侍女及公私賤良家女以入, 遣使八道, 搜採無遺, 數幾至萬, 중략. 沈酗其中, 惟日不足, 率興淸等, 遊馳禁標內, 或獵或飮, 歌舞荒亡. 性狂躁, 不能久留一處, 驅逐倏東忽西, 雖近侍內人, 莫測其行止. 又稱奉孝慈殿, 進宴無虛日, 或深夜馳進開宴, 或逼侍遠遊, 歷崎嶇阻險, 大妃亦不能堪, 懼不敢違. 常設內宴, 必命宗宰、士大夫妻入參, 至有連日夜不出者, 醜聲播聞. 중략. 王自知所行不道, 內怍於心, 欲混亂人道, 使同於己。 乃短士大夫親喪, 指有孝行者, 爲詭異而殺之, 逼令兄弟, 相奸其妾, 三綱絶而彝倫熄滅。 於是衆叛親離, 中外咸怨, 唯士洪、壽永及群小奸侫之輩, 怙勢自恣, 當時在大臣之列者, 傍觀無如之何。 貪寵畏禍, 一復一日, 莫有爲圖存社稷計者. (또 시녀 및 공·사천과 양가의 딸을 널리 뽑아 들이되, 사자를 팔도에 보내어 빠짐없이 찾아내어 그 수효가 거의 만 명에 이르렀으며, 중략. 왕이 그 속에 빠져 오직 날이 부족하게 여기며 흥청 등을 거느리고 금표 안에 달려 나가 혹은 사냥, 혹은 술마시며 가무하고 황망하였다. 성질이 광조하여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내달려 동쪽에 있다 서쪽에 있다 하므로 비록 가까이 모시는 나인이라도 그 행방을 헤아리지 못했다. 또 자전을 효도로 받든다 하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되 때로는 밤중에 달려가 연회를 베풀기도 하고 때로는 시종들을 핍박하여 험한 곳에 놀이를 나가기도 하였는데, 대비 또한 능히 감당치 못하면서도 두려워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며, 언제나 내연을 베풀되 반드시 종재·사대부의 아내를 입참하도록 하였는데, 연달아 밤낮으로 나오지 못하는 자가 있으므로 추문이 파다하였다.
중략. 왕은 스스로 자신의 소행이 부도함을 알고 내심 부끄러워하여 인도를 혼란시켜 자기와 같게 만들려고 하여, 사대부의 친상을 단축하였으며, 효행이 있는 사람을 궤이하다 하여 죽였고, 형제들을 핍박하여 그 첩을 서로 간범하게 하니, 삼강이 끊어지고 이륜이 소멸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이탈하여 중외가 다 원망하는데, 오직 사홍·수영 및 간사하고 아첨하는 군소 무리들이 세력을 믿고 스스로 방자하므로, 당시 대신의 반열에 있는 자들은 방관할 뿐 어찌 할 수 없었다. 총애를 탐내며 화를 두려워함이 날로 더하여 사직을 보전할 계책을 도모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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