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봉지 담던 손으로 수퍼볼을 쥐다…미국 주류 사회를 얼어붙게 만든 ‘화난 토끼’
파이낸셜뉴스
2026.02.08 01:35
수정 : 2026.02.08 01:34기사원문
'영어 거부' 선언한 배드 버니, 1억 명의 성소(聖所)를 문화 전쟁터로 만들어
"나의 공연은 나의 문화를 기념하는 방식이다.
나의 민족,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위한 것이다."
2026년 2월 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의 리바이스 스타디움. 전 세계 1억 명이 넘는 시청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제60회 수퍼볼 하프타임 쇼 무대의 주인공은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한 라틴 청년이다. 푸에르토리코의 작은 마을 슈퍼마켓에서 식료품 봉투를 담던 '배거(Bagger)' 출신, 본명 베니토 안토니오 마르티네스 오카시오(32). 한국에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수퍼스타인 '배드 버니(Bad Bunny)'는 지금 미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를 통째로 뒤흔들고 있다.
단독 스페인어 아티스트로는 역사상 최초로 수퍼볼 메인 무대에 서는 그를 두고 미국 사회는 지금 전례 없는 '문화 전쟁' 중이다. 현직 대통령이 보이콧을 선언하고 보수 진영이 '대안 공연'을 준비하며 맞불을 놓는 이 기이한 풍경은, 배드 버니라는 한 개인을 넘어 '누가 미국의 주류인가'를 묻는 시대적 질문으로 번지고 있다.
배드 버니는 스트리밍 시대에서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적인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스포티파이에 따르면 그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 그리고 2025년에 다시 한 번, 총 네 번이나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아티스트로 선정됐다.
여러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수백억 회의 스트리밍 횟수를 기록했다. 2025년까지 31세인 그는 스페인어 앨범으로 빌보드 200 차트에서 네 번이나 1위를 차지했고, 그래미상 16개 부문 후보에 올라 6개의 상을 수상했다. 그의 지속적인 성공은 그를 테일러 스위프트, 비욘세, 위켄드와 같은 동시대 최고의 글로벌 팝스타 반열에 올려놓았다.
성조기가 휘날리는 무대에서 스페인어 노래가 울려 퍼지는 것은 문화 침공
배드 버니의 수퍼볼 공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뿐 아니라 공화당, MAGA 진영에도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2026년 수퍼볼 하프타임 쇼 헤드라이너로 선정된 것은 끔찍한 선택이며, NFL이 푸에르토리코 출신 가수 겸 래퍼를 선정한 것은 증오를 조장하는 행위."(트럼프 대통령)
"미국을 그토록 증오하는 듯한 사람을 하프타임 쇼 대표로 뽑은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트럼프 진영 핵심 인사인 코리 레완도프스키)
"배드 버니가 반미 선전을 유포하고 있다."(토미 투버빌 공화당 상원의원)
"이민세관집행국(ICE) 요원들이 현장에 있을 것이다. 국토안보부가 행사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수퍼볼에 가는 모든 사람들이 경기를 즐기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정신이죠."(크리스티 노엠 국토안보부 장관)
보수 청년 운동가 찰리 커크가 이끌다 사망한 뒤, 그의 아내 에리카 커크가 이끌고 있는 우익 단체인 터닝 포인트 USA는 "올 아메리카 하프타임 쇼" 라는 이름의 맞불 콘서트를 기획했다. 이 쇼는 수퍼볼 하프타임 쇼에 맞서기 위해 기획됐다. 배드 버니의 공연과 비슷한 시간에 미국 내 보수 방송국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이 쇼에 참여하는 록 가스 키드 록은 성명서를 통해 배드 버니를 겨냥해 "그가 드레스를 입고 스페인어로 노래하는 댄스 파티를 연다고? 멋지군. 우리는 미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멋진 노래들을 들려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래미에서 터진 "ICE OUT"
왜 그토록 MAGA 진영에서 배드 버니를 싫어하는 것일까. 이미 배드 버니는 여러 번 정치, 사회적 문제에 적극 발언해 왔다.
올해 초 68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한 배드 버니. 스페인어로만 이뤄진 앨범이 그래미에서 수상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그의 소감은 다음과 같다.
"ICE는 물러가라(ICE OUT). 우리는 야만인도, 동물도, 외계인(aliens)도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며 미국인이다."
이미 배드 버니는 지난해 월드 투어 계획을 발표하면서 미국 본토에서는 공연하기로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미국 이민단속국(ICE) 요원들이 공연장 밖에서 이민자 팬들을 단속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스스로 설명했다.
"미국에서 공연하지 않는 많은 이유가 있고, 그 중 하나는 ICE가 내 콘서트 바깥에 있을 수 있다는 문제였다."
배드 버니는 정치적 존재감이 폭발한 계기는 2019년 여름 푸에르토리코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였다. 당시 리카르도 로세요 주지사가 측근들과 나눈 비공개 채팅방에서 여성 비하, 동성애 혐오, 그리고 허리케인 피해자들을 조롱하는 발언을 한 사실이 폭로되자 분노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배드 버니는 해외 활동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 시위에 합류했다. 그는 리키 마틴, 레지덴테 등과 함께 수만 명이 모인 시위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주지사가 물러날 때까지 침묵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 과정에서 발표된 저항곡 'Afilando los Cuchillos(칼을 갈며)'는 시위의 비공식 주제가처럼 퍼져 나갔다.
결국 로세요 주지사는 사퇴했고, 이 사건은 연예인이 상징을 넘어 실질적인 정치적 변화를 촉발한 이례적 사례로 기록됐다. 배드 버니는 이때부터 '인기 가수'가 아닌 '발언하는 공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3000명이 죽었다"…허리케인 마리아와 미국의 책임
그의 분노는 지역 정치에만 머물지 않았다. 2017년 푸에르토리코를 초토화한 허리케인 마리아 이후, 배드 버니는 미국 연방정부의 대응을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 특히 사망자 수 축소 논란과 복구 지연은 그가 반복적으로 문제 삼은 대목이다.
2018년 미국 NBC의 토크쇼 무대에 오른 그는 공연을 시작하며 "3000명이 죽었는데 대통령은 이를 부정하고 있다"고 직격했다. 이는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 발언은 푸에르토리코가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음에도 투표권·정치적 대표성에서 배제된 '반쪽 시민'이라는 현실을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각인시켰다. 배드 버니가 보수 진영에서 '불편한 존재'로 인식되는 이유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배드 버니의 문제 제기는 성소수자 인권으로도 확장됐다. 2020년 푸에르토리코에서 트랜스젠더 여성 알렉사 네그론 루시아노가 잔인하게 살해당했지만 사회적 반응은 미미했다. 그는 이 침묵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같은 해 다시 출연한 '지미 팰런 쇼'에서 배드 버니는 치마를 입고 등장해 공연 후 재킷을 벗었다. 그 안에는 "They killed Alexa, not a man in a skirt(그들은 치마 입은 남자가 아니라 알렉사를 죽였다)"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가 있었다.
라틴 음악계에 뿌리 깊은 마초 문화와 성소수자 혐오를 정면으로 비판한 이 장면은 강렬한 상징으로 남았다. 그는 '거친 라틴 남성 래퍼'라는 고정관념을 스스로 해체하며 인권 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몇 안 되는 글로벌 팝스타로 자리 잡았다.
트럭 운전사의 아들, 토끼 탈을 쓴 소년의 분노
배드 버니의 서사는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 1994년 푸에르토리코 북부 베가 바하(Vega Baja)의 노동계층 가정. 베가 바하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한 작은 마을이다.
아버지는 밤낮없이 트럭을 몰았고, 어머니는 공립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화려한 팝 스타의 배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의 집에는 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부모님이 즐겨 듣던 살사와 메렝게, 라틴 팝은 그에게 공기 같은 존재였다.
그의 첫 무대는 클럽이 아닌 교회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권유로 어린이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쌓은 보컬 경험은 훗날 그가 보여줄 독특한 감성과 리듬감의 자양분이 되었다. "기교보다는 감정을, 과시보다는 공동체의 목소리를 담는 법을 교회에서 배웠다"는 그의 회고는 배드 버니 음악의 진정성을 설명하는 핵심 고리다.
'배드 버니'라는 예명에는 그의 고집스러운 정체성이 담겨 있다. 초등학생 시절, 부활절 축제 때 억지로 토끼 코스튬을 입고 찍은 사진 속에서 그는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하고 귀여운 토끼가 되기를 거부했던 그 소년의 반항심은 이제 기성 문화와 관습을 거부하는 아티스트의 철학이 되었다.
푸에르토리코의 햇살과 라디오, 그리고 '에코노' 마트의 소음
그의 기억 속 푸에르토리코는 가난하지만 찬란한 색채로 가득하다. "우리 집 라디오는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5살 무렵, 푸에르토리코 래퍼 비코 C(Vico C)의 앨범을 선물 받았던 날의 설렘은 그를 음악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는 장난감 대신 CD를 가지고 놀던 아이였다.
고등학교를 진학 할 무렵, 그는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프리스타일 랩을 시작했는데 사람들을 놀리면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짧은 랩들이었다.
"그는 항상 라임을 썼고 비록 남들을 놀리면 웃기는 내용이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죠. 저는 항상 그에게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배드 버너의 어릴 적 친구의 이야기다.
푸에르토리코 대학 아레시보(UPR)에서 시청각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던 시절, 그는 생계를 위해 지역 슈퍼마켓 '에코노(Econo)'에서 일해야 했다. 낮에는 손님들의 식료품을 봉투에 담으며 시급 몇 달러를 벌었고, 밤에는 좁은 방 안에서 중고 노트북으로 비트를 만들었다. "마트에서 봉지를 포장하며 손님들의 일상을 관찰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그들의 고단함이 내 가사가 되었다."
그는 2016년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린 곡 'Diles'가 우연히 프로듀서의 귀에 들어가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는 성공의 정점에서도 결코 '미국식'으로 자신을 가공하지 않았다.
"왜 영어를 써야 하죠?"…언어의 제국주의에 던진 선언
배드 버니 현상의 가장 경이로운 점은 그가 단 한 번도 '영어 앨범'을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 샤키라나 리키 마틴 같은 라틴 스타들이 미국 시장을 위해 영어로 전향했던 것과 달리, 그는 고집스럽게 스페인어만을 고수했다. "나는 스페인어로 꿈을 꾸고, 스페인어로 사랑을 고백한다. 내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은 곧 내 음악을 죽이는 일"이라는 그의 신념은 견고했다.
이 선택은 통계적인 기적으로 이어졌다. 2022년 앨범 'Un Verano Sin Ti'는 빌보드 역사상 최초로 스페인어 앨범으로서 연간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최근 발표한 'Debi Tirar Mas Fotos' 앨범에서는 아예 가족의 목소리와 푸에르토리코의 소음들을 샘플링해 넣으며 자신의 뿌리를 더욱 공고히 했다. 외신들은 이를 두고 "시장이 변한 것이 아니라, 이미 변해버린 시장의 민낯을 배드 버니가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영어로 미국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푸에르토리코의 억양과 라틴의 리듬,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날것 그대로 무대에 올린다. 이번 수퍼볼 하프타임 쇼에서 그는 푸에르토리코의 전통 거리 축제를 재현하겠다고 예고했다. "내가 수퍼볼 무대에 서는 것은 단순히 유명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내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무시당할 수 없다는 증거"라고 그는 말한다.
pride@fnnews.com 이병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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