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공 대신 '분홍 책가방' 들고 입장한 선수들… 전 세계 울린 이란의 '무언의 시위'
파이낸셜뉴스
2026.03.29 13:26
수정 : 2026.03.29 13:26기사원문
축구공 대신 '분홍 책가방' 들었다… 175명 희생 기린 이란의 무언의 시위
"소녀들을 잊지 않겠다"… 전쟁의 비극 앞에 자발적 연대 나선 선수단
하필 전 경기 미국 개최?… '멕시코 변경' 간청 외면한 냉정한 FIFA
"미국 오면 생명 보장 못해"… 트럼프 발언에 벼랑 끝 몰린 이란 축구
[파이낸셜뉴스] 전쟁의 잔혹한 포화 속에서도 축구는 계속되어야 하는가. 아니, 이들에게 지금 축구보다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소녀들의 목숨을 기리는 일이었다.
월드컵 출전마저 벼랑 끝에 몰린 이란 축구대표팀이 국제무대에서 전 세계의 가슴을 울리는 '무언의 시위'를 펼쳤다. 그라운드에는 총성 대신 묵직한 침묵과 슬픔만이 흘렀다.
이는 지난 1일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습으로 발발한 전쟁의 참혹한 희생자, 특히 '샤자레 타예베 여자 초등학교' 공습으로 목숨을 잃은 소녀들을 추모하기 위한 결연한 행동이었다. 테헤란 당국에 따르면 이 비극적인 폭격으로 어린이와 교사를 포함해 무려 175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메흐디 모하마드 나비 이란축구협회 부회장은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비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선수들이 여학교 폭격 사건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며, "이것은 희생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선수단이 자발적으로 결정한 상징적인 제스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장 큰 문제는 이란의 북중미 월드컵 출전이 사실상 '시계 제로' 상태에 빠졌다는 점이다. 이란은 이번 월드컵에서 벨기에, 이집트, 뉴질랜드와 함께 G조에 편성되어 있으며, 모든 조별리그 경기를 미국 본토에서 치러야 하는 얄궂은 운명에 처해있다.
전쟁 발발 직후 월드컵 보이콧까지 시사했던 이란축구협회는, 고심 끝에 "미국이 아닌 멕시코에서 조별리그를 치르게 해달라"며 참가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국제축구연맹(FIFA)은 냉정했다. FIFA가 사실상 이 대체 개최 요구를 거절하면서 이란 대표팀은 사면초가에 빠졌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이 기름을 부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초 이란 대표팀의 미국 입국과 관련해 "언제든 환영한다"면서도, "선수들의 '생명과 안전'을 고려한다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뼈있는 경고를 날렸다. 사실상 목숨을 걸고 미국 땅을 밟으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조국이 불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경기력이 나올 리 만무했다. 슬픔을 안고 뛴 이란은 이날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서 1-2로 무릎을 꿇었다. 이란은 현지 시간으로 오는 31일 터키에서 코스타리카를 상대로 두 번째 평가전을 치를 예정이다.
전쟁의 비극과 정치적 셈법, 그리고 FIFA의 원칙론 사이에서 길을 잃은 이란 축구대표팀. 과연 그들은 미국 땅에서 열리는 월드컵 무대에서 다시 한번 소녀들의 책가방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전 세계 축구 팬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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