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후에 배워야 할 것들

파이낸셜뉴스       2026.04.12 19:15   수정 : 2026.04.12 19:15기사원문

지난해 우리는 봄을 알리는 싱그러운 소식 대신 '초대형 산불'로 봄을 맞이했다. 2025년 3월 21일 경남 산청에서 시작된 불과 다음 날 경북 의성·울주·양산 등지에서 잇따라 난 불이 강풍과 건조한 날씨 속에서 동시에 커지며 하나의 '영남권 산불 사태'로 묶인 사건 얘기다. 일주일 이상 지속된 이 사태로 183명의 인명피해와 10만4000㏊의 산림이 소실돼 사상 최악의 산불로 기록됐다.

지난해 그 거대했던 산불을 보면서 든 생각이 하나 있다. 산불이 날 때마다 우리는 늘 두 가지 단계를 빼먹지 않고 실행한다. 첫째, 불이 번지는 영상을 휴대폰으로 실시간 시청한다. 둘째, 입산자 부주의를 저주한다.

여기서 두 번째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물론 산불 위험이 있는 곳에서 불을 피우거나 담뱃불을 끄지 않고 버리는 사람이 문제다. 그러나 나쁜 사람은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나쁜 사람 한 명이 지른 불이 왜 서울 면적의 절반을 삼키느냐다.

통계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전체 산불 건수에서 대형 산불은 1%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 피해면적의 약 90%를 차지한다. 자주 발생하는 산불들은 대부분 금방 진화되지만, 극소수의 초대형 산불이 산 전체를 잿더미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것은 방화범 몇 명을 잡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불이 번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다는 뜻이다.

그 구조의 이름은 '과밀한 숲'이다. 한국의 목재 수확률은 약 20%다. 나무가 자라는 만큼 베어내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숲에는 수십년간 베이지 않은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임업 선진국들이 수확률 80% 이상을 유지하며 숲의 밀도를 조절하는 동안, 우리 숲은 산불 연료를 차곡차곡 비축해 온 셈이다. 나무 한 그루가 불을 피우는 게 아니다.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이 불을 증폭시킨다.

'나무를 베면 환경 파괴'라는 통념은 이 대목에서 뒤집힌다. 나무를 베어내지 않은 숲이 오히려 더 큰 환경재앙을 부르고 있다. 한 번의 대형 산불이 방출하는 탄소의 양은 수십년치 산림 흡수량을 단숨에 날려버린다. 나무를 아끼다 숲을 잃는 꼴이다.

기후위기도 같은 구조다. 분리수거를 성실히 하고 텀블러를 챙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죄책감의 총합이 실제 온실가스 배출에 얼마나 영향을 줄까. 전 세계 온실가스의 약 73%는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전기·난방·교통을 작동시키는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 시스템에서 나온다. 개인이 아무리 부지런히 줄여봤자 시스템이 그대로라면 73%의 벽 앞에 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기업들은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보고서를 낸다. 정부는 탄소중립 로드맵을 발표한다. 시민들은 환경의 날에 플로깅을 한다. 그리고 다음 해 여름, 전년도보다 더 뜨겁고 더 긴 폭염이 온다.

산불은 개인의 부주의가 아니라 국가의 임업정책이 결정한다. 기후위기는 개인의 생활습관이 아니라 국가의 에너지 정책이 결정한다. 이것이 불편한 이유는 간단하다. 개인에게 잘못을 물으면 책임이 분산되지만, 구조에 잘못을 물으면 정치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숲의 나무를 더 많이 베어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금기처럼 들린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해 전기요금이 올라야 한다는 말도 선거철엔 아무도 꺼내지 않는다. 버스와 지하철 중심으로 도시를 다시 설계하자는 말은 도로 확장 공약 앞에서 늘 밀린다.

불이 나면 사람들은 묻는다. 누가 불을 질렀느냐고. 정작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왜 이 숲은 불이 붙으면 이렇게 번지느냐고, 그 구조를 누가 이렇게 내버려 두었느냐고.

봄이 되자 올해도 여기저기서 산불 소식이 들려온다.
불이 번지지 못하게 하는 건 정책이다. 우리가 정치에 요구해야 할 것은 소방차 한 대가 아니라, 불이 번지지 않는 숲과 온도가 오르지 않는 시스템이다. 개인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적고, 정치가 바꿔야 할 것은 생각보다 많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전국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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